동아시아 사역 후기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05-11-11 10:05:37    조회: 3,998회    댓글: 0
선교지에서 두번 글을 올리려고 시도 했었는데 두번다 불발되고 말았습니다. (두번 다 장문이었는데). 두번째 시도가 이유없이 날라가 버렸을 때 이것은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드렸지요. 생생한 선교지에서의 느낌을 글에 담았었는데 그냥 veto 당해 버리고 말았지요.

이제 필라로 귀가한지 정확하게 한 주간이 지났습니다. 몇 일 비몽사몽간에 지내다가 이제는 정신이 바짝 듭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일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중국과 한국의 일정이 긴 꿈을 꾼 것 같이 지나갔습니다. 한참 중국 사역이 진행 될 때는 참 길다고 느껴졌습니다. 지겹다거나 싫어서가 아니라 해야 할 일들이 참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북경에서의 첫 주간은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참 고단했습니다. 필라에서 벅차게 뛰다가 곧바로 중국을 향했습니다. 인천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 것이 원래 뜻은 아니었지만 숨을 돌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생각도 했는데 하루를 공항에서 stand by 하여 지낸 것이 몹시 피곤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북경에 들어가서 기적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할 수 없은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생각됩니다. 한번도 강의를 한 적이 없었던 성령론 강의안을 마무리 짓고 또 학기말 고사까지 모범답안을 포함해 마쳐 놓고 참 감사했습니다. 32시간의 강의를 통하여 마음에 매여 있던 것들이 풀리는 느낌은 저 만 가졌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모두 얼굴이 환하게 달아 올랐으니까요. 강의를 마치고 차비하여 공항으로 나가야 하는 순간에도 끝까지 붙들고 자신들의 사역처에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상담을 구했을 때, 저는 그 분들의 고민을 들으면서 참 감격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해 보려는 의지가 얼마나 아름다왔던지 . . . . 중국에 참 신실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일정을마치고 연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타고서 한없이 감사했습니다.

연길에서 장 교수님 가정과 함께 오랜만에 많이 사귈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곳에서 일하시는 M 들과의 만남도 참 감사했구요. 기독교 윤리라는 주제였지만 결국 십계명에 대한 강해였구요, 그것을 나누며 서로 주어진 사역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장 교수님도 계속 수업에 동참하면서 영혼을 충전하시는 모습이 참 기뻤습니다. 연길에서의 강의는 그분들의 사정상 3일에 채워서 했구요, 남은 하루는 북한으로 통하는 세관이 있는 도문시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루 빨리 복음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면서 . . . . 연변에 있는 복지병원을 방문해서 그곳에서 사역하시는 의료M들과 만났고 지하신학교에서 깜짝 특강과 저녁에는 연길외국인교회(한국 교민들을 위한)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획하지 않은 Q&A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어청난 인파에 휩쓸리며 한국을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연길과 인천 사이에는 많은 인적 교류가 있는 것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비행기 옆 자리에 타신 분은 연변의 유일한 조선족 TV, Radio 방송국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는 분이었는데 경희대학 신문방송학과에서 석사논문 심의를 마치기 위하여 한국에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조선족들과 북미 이민자들을 비교하며 많은 얘기를 나눴씁니다. 그 분들이 생각하는 "정체성"의 문제 . . . . 할 얘기가 많더군요.

서울에 도착해서 곧바로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한국 각 학교에서 활약하시는 신학 교수님들과 1박2일의 일정으로 수양회를 갖게 된 거지요. 같이 울고, 웃고, 먹고, 싸우나하고 . . . 그렇게 마치 의형제가 된 듯,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꿈꾸며 시간가는줄 모르고 삶과 생각을 나눴지요.

총회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고 학교 채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학교 채플이라고 cozy한 자리가 아니고 마치 한국의 대교회를 연상 시키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2,500석이 있는 대형 예배당을 거의 꽉 매운 학생들과 교수들 앞에서 말씀을 나누며 생각했지요. 이 학교가 한국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 것인지를. 매년 1000여명씩 졸업하고 나가서 각 지역에 흩어지는 이 거대한 신학교가 바로 서야 한국 교회가 갱신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바짝 들더군요. 그 학교에 많은 교수님들과 깊은 친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만 봐도 반갑고 좋은 그런 시간을 나눴지요.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얼굴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유년부때 저의 교사를 하시던 조병헌 집사님이 이제는 신학생이 되어 조병헌 전도사로 나타나셨고, 제가 LA교회에서 지도하던 젊은이가 이민 생활을 접고 신학생으로 한국 교회를 위하여 훈련 받는 모습. 그런데 그 맘속에 얼마나 소명 의식이 분명하든지 . . . . 생명을 건다는 얘기를 몇번 하더군요.

마지막 날, 홍성사 사옥에서 있었던 C. S. Lewis 세미나 강사로 섬길 기회가 있었습니다. 시인과 촌장으로 유명한 하덕규 집사 (천안대학 응용음악과 교수)의 수고로 한국에서 기독교 문화 사역에 애쓰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팔복 시리즈로 유명한 김우현 다큐멘타리 감독, 평양과기대 부총장 장진호 교수, 한국에서 문화사역으로 활발하시다는 박양식 목사, 루이스 광인 임성빈 형제, 최원준 목회와 신학 편집부장, 외, 음악인, 연극인, 편집인들, 그 밖에 인터넷 광고를 보고 이곳 저곳에서 찾아온 분들과 진지하게 기독교와 문화의 접목점을 찾아 보려고 함께 고민한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에 이분들을 중심으로 C. S. Lewis Society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홍성사에서 루이스의 신앙서적들을 집중적으로 출판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할 것 같습니다. (www.cslewis.co.kr로 가 보십시오).

숨가쁘게 달려 필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을 때, 너무 보고 싶었던 아가들의 모습이 달려오는 듯하고, 기쁨의 교회 성도들의 환한 모습들이 반겨 주는 듯 했습니다. 행복한 교회 목사라고 얼마나 자랑을 했는지 . . . . 너무 잘난척을 해서 미안할 정도로. 사람들이 나를 하나는 알면서 둘은 모르는 바보라 할찌라도 그냥 그렇게 쓰임 받고, 쓰여지고, 또 쓰여지게 될 것이 행복한 그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젠 또 앞만 보고 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와 또 저를 동행해준 아내 (그래서 어디에 가든지 집에 있는 것 같이 포근하게 느끼게 해준) 그리고 우리 대견스러운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여러가지로 돌봐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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