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S. 루이스 신학의 정체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15-12-23 07:54:24    조회: 5,289회    댓글: 0
아래 내용은 벌써 오래전에 "기독교 사상"이란 간행물에 제가 발표했던 글입니다. 뜻밖에 온라인으로 발견하여 오랜만에 다시 대하게 되어 반가움에 여기에 올려 놓습니다. 보관상의 의미도 있구요. 내용이 조금 딱딱하고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C. S. 루이스에 대해서 신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분들을 위한 간결한 개론 정도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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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상 (2006년 3월호)
[특집: 왜 C. S.루이스인가?]
 
"C. S. 루이스 신학의 정체"
 
 
옥스포드 대학의 문학 비평가였던 C. S. 루이스가 기독교 변증가로 예측하지 못했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였다. 그의 유명세는 대영제국의 울타리를 떠나 대서양 건너 미 대륙까지 강타해서 타임(the Time)지의 표지 인물이 되기도 했으며 “회의주의자들에게 보냄받은 사도(An Apostle to the Skeptics)”라는 거창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의 괄목할 만한 영향력에 대하여 반갑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자들도 있었다. 일례로 알리스테어 쿡은 루이스를 주목할 필요가 전혀 없는 꼬마 선지자 일 뿐이라고 비꼬면서 그에 대한 기억은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심리적 혼란기가 끝남과 동시에 사그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루이스의 작품 활동이 한창일 당시 런던에서 나돌던 한 작은 책자에서는 그의 기독교 변증은 “이성에 의지하기 보다는 충격 요법을 통해 남을 설득하려는 시도일 뿐”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스의 삶과 작품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커져만 갔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30여 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미국과 영국에서만 매년 팔리는 그의 책의 수가 육백만권을 넘어섰다. 그리고 그런 추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날이 갈수록 더할 뿐이다.

루이스의 삶을 기초로 한 영화, <새도우 랜드>가 영화의 메카 헐리우드로부터 전 세계의 관객들에게 루이스를 인식시켜 주었고, 최근 디즈니사에서 출품한 『나니아 연대기』의 첫 작품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영상화한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다. 결국 루이스는 20세기의 범주를 넘어 21세기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인물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신학자가 아니었던 루이스의 신학을 논하는 것이 필요한 것일까? 한 가지 괄목할만한 추세는 과거와 달리 루이스의 신학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루이스가 언급한 내용들이 본질상 신학적인 것들이고, 그가 비록 평신도 신학자였지만 실제로 신학적 추론과 토론을 그 무엇보다 즐겼다고 하는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 루이스 자신도 스스로를 영국 국교회의 일반 평신도라고 칭하고 있으며, 그의 작품들 역시 전문 신학자가 아닌 평신도의 위치에서 이미 오랜 시간을 거쳐 보편화된 정통적인 신학의 재진술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그의 신학에 대한 체계적인 평가를 요구해야 할  것일까? 이것에 대하여 몇 가지로 답할 수 있다.

첫째로, 루이스 스스로 자신을 아마추어 신학자라고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매우 광범위한 독서를 통하여 엄청난 양의 신학적 주제에 관한 지식을 내적 자산으로 축적해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가 언급한 내용들은 지성인들에게 적지 않은 지식을 전달하고 지각적 자극을 부여 할 수 있는 무게가 있는 것들이다.

둘째로, 루이스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신학 서술의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새로운 방법론 자체로써도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문학적 기법으로 사용한 다양한 형태의 표현 방법들은 그의 신학적 노력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활력을 주는 기회를 제공한다. 신학적으로 주목할 만한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장르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여기에는 다수의 산문과, 편지, 판타지 소설, 수필, 회고록 등이 포함되어 있다. 변증학자인 죤 프레임(John Frame)은 “신학적 진술이 형식적이고 학문적인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은 독단적인 것이다. 오히려 이보다는 성경 자체가 그러했듯이, 극본, 경탄, 노래, 비유, 상징 등의 광범위한 인간 언어로 된 것이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루이스는 도리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을 택하였고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가치가 있는 신학적 작업을 수행한 인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이스의 신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그의 짤막하지만 중요한 단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1939년에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본질적인 특징은 타종교와 비교 했을 때 종교로서의 발달의 정도 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와 구원주의(salvationism)를 갖췄다는 것이며 이것은 기독교와 물을 섞은 듯한 기독교를 빙자한 현대판 종교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루이스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초자연주의와 초월적 구원주의의 강조가 눈에 들어오며 이것이 그의 신학적 중심 사상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의 핵심이며 그의 신앙적 전제와 세계관이었다.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를 주창하게 된 동기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건설적 열망(Constructive Motive)으로 이것은 사분오열된 교회와 교단들의 합일성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고, 둘째로 개혁적 열망(Corrective Motive)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원형적 신앙으로의 회복에 대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순전한 기독교”는 루이스 당시에 편만하던 자연주의적이며 윤리주의적 구원론에 초점을 맞췄던 “물탄 기독교”(Christianity and water)에 대하여 강력하게 도전하는 목소리로 나타난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동기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용어의 근원인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 사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백스터 역시 당시 만연해 있던 안일한 종교적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려 했을 뿐 아니라 모든 진실한 신자들에게 동일한 신앙의 기초를 확립해 주려 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백스터와 아울러 루이스 역시 현실과 밀접한 상황화된 신학 작업을 한 자들로서 자연주의적이며 인본주의적 종교에 대항하여 선지자적 예리함으로 성경적 세계관을 촉구한 장본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두 가지 동기를 중심으로 루이스 신학의 핵심을 들춰내 보자.

건설적 동기(Constructive Motive):

루이스가 주창했던 “순전한 기독교”는 “모든 세대의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믿음의 실체”에 대한 제시이다. 키블(N. B. Keeble)은 루이스와 백스터를 비교한 글에서 이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살던 시대의 교리적 불일치로 인한 영적 혼돈을 깊이 인식하였으며, 또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믿음의 실체”를 밝힘으로써 일관성 없는 신앙적 주장들의 사이에 연결점을 마련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라고 했다. 이들은 신학적으로 예민하거나 논쟁의 여지를 안고 있는 문제들 사이에 자취를 남기기보다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공통적인 지반을 제공하고,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고백의 의미를 밝히는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루이스는 모든 세대의 진정한 기독교인들을 하나로 연합해 줄 수 있는 “확실하고, 자기 모순적이지 않으며, 고갈되지 않는” 기독교의 표지로써의 본질을 확고하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굳게 지켜야 할 믿음의 절대적이며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초교파적이라는 명분아래 맥 빠지고 색깔 없는 기독교의 모습과는 달리 본질적인, 그래서 더욱 달라 보이는, 명확한 기독교의 메시지가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특히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업이 필수적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듣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일관성 없이 혼란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건설적인 의미에서의 루이스적 신학의 목적은 연합적(ecumenical)이며 동시에 복음제시적(evangelical)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의 출간이 갖는 성과에 대해 분명한 확신을 표명했다. “이 책에 대해 언급한 비평들과 수많은 편지들을 통해서 판단해 보건대, 몇 가지 점에서 실수가 발견되긴 하였지만, 적어도 동의할 만하고, 공통적이며, 핵심적이며 ‘순전한’ 기독교를 제시하는데 성공했다”고 서론에서 선포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즉 “순전한 기독교”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기능을 갖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대합실과 같이 “열려진 문들을 통해 작은 방들로 들어가기 전에 멈춰서야 할 넓은 홀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요리를 하기 위한 스토브와, 맛있는 음식들, 안락한 의자들은 홀을 지나서 각자 찾아 들어가야 하는 작은 방들 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상기시키면서, 다양한 교회와 신학적 전통들의 역할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인정했다.

개혁적 의지(Corrective Motive):
 
다음으로, 개혁적 차원에서 “순전한 기독교”는 당시 시대적 정신에 근거한 기독교에 대한 그릇된 진술들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모조품과 같은 유사 기독교들과 진정한 기독교를 구분해 주는 시금석이 바로 “순전한 기독교” 그 자체이다. 루이스는 비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보아도 명백히 드러날 수 있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통일성을 갖춘 연합체”로써의 기독교의 본질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분명하게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현재 떠돌고 있는 잡다한 종교에 대한 의견들로부터 관심을 끊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도리어 역사적 과거에서 찾을 수 있는 확고한 교훈을 되돌아 발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앞서간 지혜로운 신앙의 선배들이 남겨준 주옥과 같은 글들을 재발견해야 하며, 이로써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적 본질을 터득하게 된다.

루이스는 “시대의 구분에 관하여”(De Descriptione Temporum)란 제목으로 1954년 캠브릿지 대학의 중세기 영문학과 과장으로 취임하는 자리에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그는 서구의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하고자 했다. 전 기독교 시대, 기독교 시대, 후 기독교 시대(the pre-Christian, the Christian, the post-Christian era)로 구분될 수 있는데, 특히 기독교 시대로 부터 후 기독교 시대로 접어 들어가는 과정에서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했다고 주장했다. 역설적인 것 같지만 그는 기독교 시대와 후 기독교 시대의 격차가 전 기독교 시대와 기독교 시대의 격차보다 더 심화된 것으로 보았다. 전 기독교 시대는 기독교 시대와 초자연적인 세계관을 공유했다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후 기독교 시대가 전 기독교 시대의 이교주의(paganism)로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마치 처녀가 결혼을 한 후에 이혼을 한다고 다시 처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말이다. 도리어 후 기독교 시대는 그 전 무엇과도 상관없는 자연주의와 진화론적 구원관, 사회관을 주창하는 전혀 새로운 세계관의 시대로 도립한 것임을 관찰했다. 안타깝게도 후 기독교 시대에 처한 교회마저 자연주의에 물들었고 윤리적 진화를 이룸으로써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인 양 착각하는 오류에 빠져 들어갔다는 것이다.

또 루이스는 “현대인과 그들의 사고 범주”(Modern Man and his Categories of Thought)라는 강연에서 현대 복음 사역자들의 고충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현대인들은 죄에 대한 인식과 절대적인 윤리기준과 아울러 초자연적 세계관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현대인이 과거 누구보다 포용적이며 객관적인 안목을 가진 것 같지만 사실은 “현대적 편협성”에 빠져 있으며 이것은 건강한 전통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진단했다. 진리에 대한 탐구 역시 닫힌 우주 속에서 물량적 실용주의에게 주도적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음을 탄식했다. 아울러 진화론적 낙관주의(developmentalism)에 기초한 역사관은 인간의 죄와 부패에 대한 개념을 한 차례 밀려왔다 사라지는 대수롭지 않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극소화시킨다. 또 프로레타리안주의(Proletarianism)는 인간들 사이에 건전한 두려움, 죄책감, 경외심 없는 무한한 자기 충족의 권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야 할 순종과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마저도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해 존재하는 (혹은 존재하도록 만들어진)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종교의 목적도 참된 구원이 아닌 이른바 사회의 안정, 전쟁의 억제, 수준 높은 삶을 구현하는 수단 정도로 이해되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객관적인 진리나 진실에 대한 관심보다 오로지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것, 사회적 유용성이 있는 것 정도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만일 이것을 줄 수 있다면 모든 종교는 사실상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나 신앙고백은 무관심과 경멸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루이스는 현대적 범주에 속한 사고방식이 신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다. “현대신학과 성서비평”이라는 글에서 루이스는 신학적 현대주의자들, 특히 성경신학자들에 일격을 가하고 있다. 성경을 문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것은 루이스의 전문 분야였음을 기억하라) 이해 될 수 없는 결론들을 산출해 내는 이들은 문학적 무지함, 근거 없는 역사적 선입관, 자연주의적 전제들, 학자적 거만함 등으로 꽁꽁 묶여 있다고 루이스는 주장한다.

현대주의적 신학자들은 꽤 포용적이며, 자유롭고, 세련되어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어떤 형태의 초자연주의도 포함하지 않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닌 그들 스스로의 종교를 갖고 있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는 이러한 현대주의적 신학 풍조들의 오류를 지적하고 이를 교정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결론지어도 무리가 없다.

루이스는 자기 스스로를 “구식 서구인”(the old Western man)이라고 불렀다. 그의 전문적 문학 비평 저서들의 학술적 중요성과 가치로 볼 때 그는 적어도 문학 분야에서 훌륭한 역사가였다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그가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16세기를 포함한 중세기 문학은 바로 그가 언급했던 기독교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는 바로 그 시대에 대한 매력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그 지나간 옛 시대의 안정되고 견고한 세계관이 현 시대의 직관적이고 상대적인 세계관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것에 비춰 보았을 때, 현대의 신학 사조는 분명 곁길로 가고 있었음을 직시했고 이것에 대하여 상당히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는 역사적인 감수성(history-sensitive)과 바른 전통에 대한 감수성(tradition-sensitive)을 지닌 역사적 기독교(historic Christianity)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순전한 기독교”의 중심:
 
루이스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현대의 “물탄 기독교”(Christianity-and-water)가 지속적으로 회피하던 진정한 기독교의 버팀목이 되는 두개의 관점을 다시 고쳐 세운 건축물에 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신학은 현대, 즉 후 기독교 시대의 정신영역을 대변하는 자연주의적(naturalistic) 기독교와 윤리 중심적(ethico-centric) 종교의 반대편에 우뚝 서서 초자연주의적(supernaturalistic)이고 “구속 중심적”(redempto-centric)인 기독교를 진술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진정한 판단 기준은 오로지 그 종교가 진정 초자연적이며 초월적 구원을 말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초자연주의와 구원주의라는 두 가지 강조점은 루이스의 신학적 전제와 입장의 디딤돌이 된다. 그에게 이 두 가지는 언제나 함께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절정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 곧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었다.

루이스의 이 두가지 관점은 그저 멋대로 고안해낸 창작일 수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금껏 지켜본 바대로 이 두 가지는 비단 그의 시대뿐 아니라 우리의 시대에도 변함없이 올바른 신앙적 삶의 자리를 제시해 주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전통적 신학이 지켜온 성경신학적 “창조주 하나님”(God the Creator) 과 “구원자 하나님”(God the Redeemer)에 대한 근본적인 신앙고백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스의 초자연주의는 모호하거나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어떤 느낌이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말 그대로 이것은 자연주의의 반대편에 무섭게 버티고 서 있는 이 세계를 해석하는 독특한 관점이다. 자연주의는 주권자가 없는 자연적 현상이 실재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믿음을 고수하려 한다. 루이스가 『기적』(Miracles)이라는 저서에서 설명하듯이 “자연은 솟아나고, 불현듯 나타나고, 발생하고, 지속되기를 스스로 그리고 저절로 반복하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상태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 스스로 생겨난 것, 누가 고안해 낸 것도 아닌, 어느 누구도 요구한 적이 없는 그런 것이다.”

반면 초자연주의는 모든 존재를 두 가지 부류로 구분한다.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존재는 스스로 존재할 뿐 아니라 원리와 기원이 되는 소수 혹은 단 하나의 존재이다.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존재들은 단지 첫 번째 부류인 그 하나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그 하나는 다른 모든 파생적 존재들의 존재 원인이 되었고, 그 자체는 스스로 존재한다. 여럿은 단 하나가 존재함으로 존재하며, 그 하나가 더 이상 존재하기를 멈춘다면 다른 모든 파생적인 존재들은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 하나의 의지에 따라 나머지 모든 존재는 변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루이스의 이 주장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초자연주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격적인 신의 존재에 대한 유신론적 믿음이며, 그 신을 조물주로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을 피조물로 규정하는 신앙이며, 그 조물주와 피조물과의 절대적인 관계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는 것이다.

한편 구원주의는 인간 역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진화론적 낙관주의 (developmentalism)를 배척한다. 인간성의 철저한 타락을 인식한 후에는, 어느 누구라도 개인과 우주 전체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창조주의 결정적인 개입과 중재는 필연적인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문제이건, 사회적인 문제이건 간에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문제 자체로부터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물로 만든 사다리를 타고 빠져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 문제의 핵심이 되는 주체가 스스로 해결을 창출해 낼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으며, 그는 구원을 계획하셨고 인류 역사는 그 종말(하나님의 목적의 완성)적 방향으로 달음질하고 있다. 바로 그 중심에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으심과 부활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삶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며 또 그것을 매일 자신의 삶에 경험하는 자들이 구원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끊임없는 여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맞이하는 좋은 위기 또는 좋은 죽음(eucatastrophe)을 통하여 자기중심, 자기 집착이라는 죄의 근본적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되는 여정이다. 매일 자신을 떠나 진정한 객관자이시며 아가페적 사랑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여정인 것이다.

위의 내용은 루이스의 신학적 구조를 가장 기초적으로 해부해 본 것이다. 물론 이제부터 구체적이며 세분적인 신학적 내용들에 대한 관찰이 요구된다. 어떠한 인물의 신학 세계를 몇 마디로 줄인다는 것은 항상 그만한 위험도가 있다. 하지만 루이스 신학의 기본적인 동기를 살펴봄으로써 적절한 해석의 방향을 잡을 수는 있다고 여겨진다. 이제 그의 작품들을 대하면서 그의 사고의 세계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신학적 내용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창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증거, 그리스도의 대속, 믿음과 회개의 본질, 순례자로서의 성도의 삶과 인도자 역할을 하는 교회의 정체, 기도와 헌신, 말씀과 성령, 기독교 윤리, 개인과 우주적 종말 등, 인식론 또는 계시론, 신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으로 구분될 수 있는 루이스의 신학적 사고를 발견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단 그의 생각들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양의 조각들로 나눠져서 이 곳 저 곳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복잡한 퍼즐처럼 맞춰 나가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실제는 그렇기 때문에 더 흥미로운 작업이 될 수 있음도 기억하면서 말이다.

박성일 l  목사는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변증학 겸임교수이며 필라델피아 기쁨의 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립대학과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M. Div., Ph.D.)에서 ‘루이스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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