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죽자, 고흐 그림 비판 4/5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24-08-25 09:09:01    조회: 87회    댓글: 0
육체는 더 이상 그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나 보다. 고흐는 스스로 아를를 떠날 결심을 하고,
St. Remy 지역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갔을 때는 아마도 자포자기였지 않았을까?  먼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고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스스로 적고 있다. St. Remy는 아를에서 그 당시
기차로 2-30분 정도 떨어진 정말 조용한 시골 동네였다. 병원은 거기에서도 조금 떨어진 동네 외곽에
있다. 주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금도 예전의 병원 건물은 그대로 남아서 고흐박물관으로
유지가 되나, 담하나 사이로 지금도 운영되는 정신병원이 있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 정말
사람소리인지 동물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비명소리가 담너머로 들리곤 했다. (아마 이곳 터가
정신병을 고치기 좋은 모양이다..) 고흐가 이곳을 도착했을 때 지금도 그렇지만 아를이랑 많이
달랐다.  조용했고, 병원 주위는 올리브나무 밭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정신병원이었다. 그곳에서 읽은 기록을 보면, 모든 환자들은 마치 전쟁 수용소의 수용자들처럼
정해진 스케줄 대로 하루를 보내야 했고, 단순한 식사에, 정해진 노동도 감당해야 했다.  규칙적인
생활로 그의 건강은 많이 회복되었다고 적혀있다. 스스로 입원을 할 때 그림은 그릴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올리브 나무들이 앞, 뒤로 잘 정리되어 있고, 개성 있게 생긴 산이 바로
옆으로 있어 그림을 그릴 소재들은 넘쳤다. 



급하고 과격함이 살짝 사라지고, 비로소 우리가 잘 아는 그 고흐의 특징이 잘 드러난 그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장 수작으로 대표되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은 바로
이 병원의 앞 뜰이었다. 가끔 발짝도 일어났지만, 말라버린 육체와 삭아버린 영혼의 빈자리에
고흐의 미술세계가 완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혼자 이 병원을 서성이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단 한 점이라도 고흐의 그림을 좀 사주었으면. 그런 소식이 테오에게서
왔더라면 아마 고흐는 달려졌을 것 같다. 기쁨과 환희로, 혹은 어떤 희망으로. 그의 육신은 차츰
회복되었을 것이고, 그의 거의 완성되어 가던 그의 붓질은 색다른 소재도 찾게 되고, 생각하지
못했던 작품들이 나왔을 것 같다.  아마 그랬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소식은 없었다, 이미 본인도
그런 기대는 없었던 것 같다. 훗날 이야기이지만 고흐가 이곳 몇 개월 생활을 마치고 그의 마지막이
되었던 오베르 Auever로 갔을 때, 파리에서는 고흐 그림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시작되었다 한다.
이미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그때. 그래서 St. Remy에 있을 때 그런 호평이 나오기 시작했거나
그림이 좀 팔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짙어진다. 단 몇개월 차이였는데.



침대와 의자 하나가 있는 유명한 그의 방 그림은 아를에 있던 yellow house 이층이었고, 그 건물은
폭격에 부서져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복사품을 만들어 놓아 사람들을 방문하게 만들었으나
다 가짜다) St. Remy에 있는 병원에서는 고흐가 지냈던 방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 봐서는
거의 포로수용소 같지만 당시를 생각하면 나름 독방에 위치도 좋았다. 쇠창살이 있지만 그래도
창문 밖의 풍경도 나쁘지 않았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 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는데 그는
나름 만족하면서 지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이 아프다. 이미 고독이라고 표현하기도 모자란
말라비틀어진 쓸쓸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정신병원의 한 귀퉁이 방.. 모범수? 모범환자라 병원밖
출입도 허락되었다,꼭 누군가가 동행을 해야 했지만.  그래서 병원 주위에서 많은 그림들을 그렸다.
그가 그림을 이젤을 놓고 그림을 그린 바로 그 자리에 그 그림들의 복사품들이이 전시되어 있다.
불과 130년전 일이다.



고흐는 St. Remy에도 오래 있지 않았다. 6개월?  그러다 파리 근교 오베르 Auver로 갔다.  이미
그곳을 갔을 때 그의 영혼은 없어져 버린 것 같다. 동생 부부도 만난고, 말이 통하는 의사도 만나고,
그가 끔찍이 사랑했던 조카도 만나지만 이미 그는 가죽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림은 그렸다.
참 끈질긴 사람이다. 마치 연료가 바닥난 차가 언제 설지 모르는 상태에서 조마조마하게 오르막을
가는 것처럼. 오베르에서 3개월 살고 생을 마감했다.  3개월.. 그 삼 개월 동안에도 많은 그림들을
그렸다. 여전히 고흐는 무명이었고,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이 고흐의 그림을 그냥 주워갔다고 한다.
(물론 제대로 된 그림은 테오가 미리 챙겨두었고. 그 후로 이 동네 벼룩시장 같은 곳에 고흐의
작들이 종종 나왔다고 한다.) 고흐는 그렇게 37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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