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죽자, 고흐 그림 비판 5/5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24-08-25 09:06:09    조회: 105회    댓글: 0
지금 생각해 보면, 아를은 나름 역사가 있는 곳이었다. 작은 도시였지만 아담한 사이즈의
콜로세움이 있고, 반원형태의 야외극장도 있다. 지금도 활용하고 있다. 모두 로마시대부터
있었던 유적이다. 그 정도 역사면 이 도시 자체로 지명도가 있는 셈인데 Flying Dutch라고
웬 이방인 인간 하나가 나타나서 2년도 채 살지 않았는데.. 이젠 이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어 버렸으니.. 이것도 좀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 쩌는 프랑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액상 프로방스 Aix-En-Provence에서
세잔을 홍보하는 것과 억지로 비교를 해 본다면, 약간의 온도차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그 지역출신의 세잔을 액상에서 기억하고 홍보하는 면에서는 긍지나 존경을 느낄 수
있었고, 아를에서의 고흐의 흔적은 어쩌면 돈냄새가 더 느껴지는 자본주의의 영향이
지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건 마치.. 비엔나에서 사람들이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차이점을 보는 것과 비슷했다. 이 도시에서 고흐는 죽어서도 쓸쓸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흐의 이야기는 테오와의 편지로 모든 것들이 마치 우리나라 왕조실록처럼 일일이 기록이
되어 자세히 남아있다.  그림 한점 한 점에 대한 설명까지. 그러니 그의 편지가 테오의 아내인
조안나에 의해 책으로 나온 후로는, 마치 그의 일생은 마치 다큐멘터리가 되어버렸다.
고흐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고, 그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본 적 없는 한 예술가의
스토리와 강렬한 그림이 한편의 위대한 서사가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술계에서는
폭발적인 수요 증가에, 실제 그의 그림에 대한 평가보다, 그림에 대한 경제적인 가치가 하늘을 찔렀다.


yellow house 시절부터 그의 그림에서 명암이 사라지고, 원근법도 사라지고, 더 이상 삼차원에
대한 집착도 사라지고, 순간의 포착이라기 보단 그의 마음을 투영하는 색채와 눈에 띄는 붓터치가
정립된다. 3차원을 이끌어내는 고전주의에서 벗어나 미술 그 자체가 가지는 고유의 무기로 미술
자체의 예술을 만들었다. 이것이 그를 후기인상파의 대표주자로 구별되게 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정리한 그의 그림에 대한 특징은 차고 넘치나, 정작 고흐 본인이 설명한 그 특징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이야기했다시피 그의 그림이나 생활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의 기록으로 모두 남아있다.  거기에 그런 후기인생파들의 특징을 인식하고 개발해서
그의 그림에 적용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런 건 후대에 평론가들이 정리해 준다는 말에 동의하나,
언제나 그의 그림들이 그랬던 것처럼 순식간에 튀어나온 우연이 겹쳐진 것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에게 돌을 던지시오...... )  그래서 미술사에 자리 잡은 그의 그림은 그 개인적인 서사가 실제
그림보다 더 비중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세잔이랑 비교가 되는 것이다.
고흐의 깊은 사색이라기보단, 아픈 그의 영혼이 캔버스에 드러난 것이라는 의구심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가는 길은 그렇게 달랐어도, 고흐도 시대의 흐름에 선구자가 되어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박물관의 인기는 그 건너편에 있는 릭스뮤지움 Rijiks Museum과 쌍벽을
이룬다.  소장품을 비교한다면 마치 릭스뮤지움은 Rijiks는 큰 바다요, 고흐뮤지엄 은 거기에 떠
있는 작은 돛단배 같다. 그래도 불구하고 고흐뮤지움의 인기는 최고이다. 고흐뮤지움 안에 있는
그림들은 테오의 아내였던 요한나가 소장하던 작품들을 그녀의 아들이자 고흐의 조카였던
요한 반 고흐가 암스테르담 도시에 기증하면서 뮤지움이 만들어지고 그 그림들은 전시되었다.
고흐의 유명한 작품들은 전 세계에 이미 흩어져 있고, 거의 조안나가 끝까지 가지고 있던 작품들이다.
그녀는 수많은 요청에도 불구하고 간직하고 있었다 한다. 하지만 그 그림들 대부분은 아직은
미숙하고 완성단계에 이르지 못한 단계에서 그린 그림들이 많다. 거기 걸린 그림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미술 작품 그 자체에 대한 감탄을 연발하는 것은 좀 오버가 아닌가 맞아 죽을
생각을 해본다. (나에게 돌을 던지시오 ........  )  자본주의에서 폭발된 그의 이름이 이미 건물
안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그를 느끼기엔 건물 자체가 너무 세련되고 화려하다. 거기 안에서
고흐의 급하고, 다혈질이고, 신경질적이고, 죽어라 고독했던 그의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
건물 자체로는 바로 옆 릭스뮤지움에 비하면 10분의 일도 되지 않지만, 고흐뮤지움에 있는
기념품 가게의 크기가 릭스뮤지움보다 크다. 개인적으로 씁쓸하다. 여기에는 고흐는 철저히
없다. 정말 고흐를 보고 싶다면 암스테르담도 아니요, 아를 Arles 도 아니고, 오베르도 아니요,
헤이그도 아닌 St. Remy를  가보길 정말 바란다. 사람 별로 없는 그곳에서 여기 저기 고흐의 흔적이
손에 뭏힌다.. 그것들을 따라가면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쓸쓸했을 것 같고, 그의 영혼은 그곳에서
파란 밤하늘 저 어딘가 반짝이는 노란 별나라를 향해 지금도 헤매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나는 때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도 않고

나만 저 노란 별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성산포 4 / 이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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