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읽고 웃어보세요.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02-11-25 06:28:16    조회: 3,224회    댓글: 0
얼마전 이국진목사님 설교중에 인용했던 "아름다운시작"의 저자 주선태 교수께서 쓰신 또다른 수필이 있어 소개합니다. 저자의 특징인 유머와 감동이 있는 글입니다. *^^*

제목: 장로교의 예정설과 나의 애정설

처음에 저는 배꼽 잡고 웃다가, 나중엔 절로 고개가 끄덕 끄덕..

 

주님께서 홀로 주관하시는 구원 역사의 신비는 신학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나에게는
그저 놀랍고 기적 같은 사건으로 밖에 여겨지질 않는다.
신학 대학을 다니면,
구원 역사의 신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깨닫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거저 주시는 구원이라는 점에서 내 체질에 딱 맞는 방법인 것 같다.
공로를 쌓고, 수양을 하고,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구원이라면,
나는 분명 낙오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누구든지 쉽게 얻을 수 있는 이 구원을 아무나 다 받지는 않는 것 같다.
공기나 햇볕처럼 누구에게나 다 주어져 있어서
그저 마시고 쬐면 자기 것이 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데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성서적이나 신학적으로 정리 해 놓은 글들은 무수히 많을 줄로 안다.
이 글은 예정설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마음에 불편함이 있는 사랑하는 내 동생을 위해 쓴다.

나는 결혼하기 전에는 여자는 방귀를 안 뀌는 줄 알았다.
조금 더 시대적인 정확성을 부연하자면,
신혼 여행 갔다 온 직후
내가 쉽게 도망갈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어떤 여자의 막강한 식성과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의사 표현의 자유를 심하게 주장하는 그녀의 창자 덕분에
그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자의 방귀는 나의 실전적 경험에 의하면 여러 종류로 분류할 수가 있다.

우선 <솔로> 또는 <축가> 또는 <선창>으로 불리는 것이 있다.
느닷없이 남편보다 먼저 터트린다는 점에서
가정의 민주주의와 남녀 평등을 뼈저리게 확인시켜 주는 좋은 도구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유교 사상이 생활 저변에 깔려 있는 우리 나라 같은 곳에서
교양 있는 여자가, 더욱이 이쁘기까지 한 여자의 예고 없는 솔로는
그 자체가 그리 흔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신혼 여행 직후, 내가 체험한 바로 그 첫번 째 솔로는
주님의 재림이 그렇게 불현듯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예언적 사건으로
내 귀와 코와 영혼을 심하게 뒤흔들었던 것이다.

다음은 <답송> 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일단 남편의 선창에 아내가 화답송으로 터트려 주는 바로 그것이다.
시간적으로 대충 2초 안에 알맞게 대응 하지 않으면
남편의 선창에 대한 답송인지, 아니면 아내의 새로운 선창인지가 혼동될 때가 생기는데,
오 년쯤 같이 살면 이 문제는 자연히 질이 들어서 해결 되는 것 같다.
부부 중에 한 사람이 새벽 예배를 드리러 가면, 화답하는 차원에서
다른 한 쪽이 종종 같이 따라 가 주는 경우가 이 때쯤부터 일어나는 것 같다.

결혼 생활 10년쯤 되면 <이중창>을 구사 하는 경지에 들어 가게 되는데,
남편의 다발총에 여인네가 화음을 맞추는 경지가 바로 이것이다.
일명 <동시상영> 또는 <스테레오> 등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사건은
신앙의 선배들이 말씀하시던 바로 <부부 일심 동체>의 경지가 이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위 말하는 <잉꼬부부>라는 둥 하는 소리를 듣기 시작하는 것도
결혼 햇수로 따져서 이 언저리가 아닌가 생각 된다.
잉꼬의 정도가 제법 심오한 부부는 밥상을 마주 하고도 스테레오를 구사한다고 하는 데
이 점으로 본다면 우리 부부는 아직 잉꼬의 경지가 심하지 않은 것 같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중창을 구사 할 수 있는 부부는
서로 따로 따로 기도해도 기도 제목이 대충 같다는데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영적, 육적으로 통하는 경지인 것이다.

같이 15년쯤 의좋게 살다 보면, <윤창>의 경지에 들어 가게 되는데,
문자 그대로 <돌림노래> 의 경지인 것이다.
자칫 이중창이 자기 소리만 강조 하다가 자기 만족에 빠지게 되는 취약점이 있는데 반해,
윤창은 쉽게 얘기해서 창자들끼리 대화 하는 경지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줄로 안다.
한 쪽의 창자의 소리를 듣고 이 쪽 창자가 답하는 영과 육의 조화라고 하면 과언일까?
하지만 소리만 가지고 하는 윤창은 약간의 경륜으로 누구나 할 수 있게 되는데,
향기가 같은 윤창이라야 더 깊이가 있는 것이다.
먹는 게 같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제목이 비슷하다 보면,
정말 모든 게 일심동체의 수준에서 윤창의 멜로디와 리듬의 조절이 가능해지며,
음색과 향기가 같아지는 것이다.

결혼 20년째에 접어들면, <침묵송> 이라는 것이 개발된다.
문자 그대로 <마음의 노래>인 것이다.
일명 <천사의 방귀>라고도 하는데, 무풍무색무향한 것이 특징이다
(바람도 없고, 색깔도 없고, 향기도 없다는 얘기).
이것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따라 주질 못해서
남편과 호흡을 같이 못 맞추는 그런 것인데,
남편의 솔로에 자동 반사적으로 대장의 근육 운동이 시작 되었으나
때를 얻지 못해 불발탄으로 끝나는 경우다.
하지만 대장 근육의 안간힘을 다 쓰며 내 뱉는 울부짖음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는 들리는 것이다.
이것이 침묵송의 비밀이다.
20 여년을 해 온 기도 제목들에 침묵으로 일관 하시는 주님을 향해
부부가 함께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때가 이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구원의 종류도 다양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솔로>적인 구원이 있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몸소 먼저 찾아 가시는 경우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예정설과 가까운 데가 많은 부류다.
본인이 별로 신경 쓰기 전에 주님이
<너는 내꺼다. 너를 내가 지금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시는 경우다.
주님께서 예고 없이 급하게 원하셨던 사도 바울의 변화가 이 경우일 것이다.

<답송>적인 구원도 있는 것 같다.
사람 쪽에서 먼저 구원을 갈망하고 주님의 답을 기다리는 경우다.
좋은 예로,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주님께 부탁했을 때,
하인의 의지와 관계 없이 백부장의 믿음으로 하인의 병이 낫는 것이
답송적인 구원의 예가 될 것 같다.
어떤 경우는 자기의 구원을 위해 간절한 염원을 가지고
구원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그 응답으로 믿음을 선물로 받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중창>적인 구원도 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것이다.
미리 구원하기로 정해 놓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보내기도 하시고,
나중에 정하셔서 우리를 급하게 보내기도 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를 동역자로 써 주시고 거기에서 큰 만족을 얻으시는 주님이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친히 역사하심을 체험 하면서
한없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윤창>적인 구원도 흔한 것 같다.
돌고 도는 인생사에 별별 사람이 다 있을 터인데,
주님의 나라와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왔다 갔다 하는 인생들을
인내를 가지고 지켜 보시는 주님이시기도 한 것이다.
6일 동안은 세상에 휩쓸려 살다가
주일 날 교회에만 오면 신앙심이 부쩍 느는 사람들의 구원이
이 근처 어디엔가 속하지 않을 까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침묵>하시는 구원이 있을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도저히 구원의 기쁜 소식이 먹히질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소리없이 침묵하시며 알맞은 때를 기다리는 그런 부류의 구원인 것이다.
나는 우리 외할아버지가 30년 이상을
당신의 며누리의 신앙을 위해 기도하시다가 돌아가신 것을 기억한다.
나에게는 외숙모님이 되시는 그 며누리가 외할아버님께서 임종하시던 날 밤에
천사가 외할아버님 곁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는 간증을 후일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예정설만이 구원의 역사의 신비를 푸는 열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구원의 역사는 얄팍한 지식을 가진 인간들이 만든 어떤 설이나 공식으로 풀려질
그런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정설만이 옳은 구원관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주님께 칭찬 받는 요소가 되기 보다는
자기 신앙의 성장에 오히려 저해가 되는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함정적인 요소로 전락 하게 될까 봐 염려 된다.

사탄의 집요한 추격에 오랜 세월을 시달려 온 우리 인간들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복음의 밧줄을 선물로 받았다고 믿는다.
주님께서 애정을 듬뿍 안고 던진 밧줄인 것이다.
누구에게는 던지고 누구에게는 안 던지고 했다고 보기엔
너무도 뜨거운 애정이 담긴 피 묻은 밧줄이기에 나는 예정설보다는 애정설을 믿고 싶다.
뜨거운 애정이 담긴 피 묻은 밧줄을 보면,
나는 왜 주님께서 울부짖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오늘도 솔로와 답송과 이중창과 윤창과 침묵송을 되풀이 하시는 잘 알 것 같다.

*주선태교수의 저서"아름다운 시작"을 읽기 원하시는 분은 제 이메일이나 이곳 게시판을 통해 연락주시면 기꺼이 빌려드리겠습니다...
주님 만난 감격과 기쁨을 함께 나누길 원하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