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열쇠, 폴 세잔 3/6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24-05-30 10:17:07    조회: 78회    댓글: 0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그 작은 동산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내리막길을 걸어 세잔의
아뜰리에에 갔다. 평범하게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 입구가 특별할 것이 없다. 내년까지
공사라 입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미리 알았지만 가봐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녔을 그 길을 나도 걸어봐야 했다. 벽도 높고, 나무들이 많아 안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여기저기서 본 이미지엔 그의 생전에는 그 아뜨리에 주위로 집이 없었고,
가까이 액상 시내가 잘 보이는 곳이었다. 아뜨리에 안엔 볕이 잘 드는 큰 창문이 있고
그가 그린 그림들의 소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진정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세잔이
늘 매고 다녔던 화구통과 이젤이었다. 그가 늘 입고 있던 낡은 망토와 모자도.
개인적으로는 나폴레옹의 그 모자보다 훨씬 파괴력과 의미는 대단하리라 하는 생각이었다.

세잔은 참 복이 많았다.  이런 훌륭한 그만의 아뜨리에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행운이었던가? 같은 시간에 이곳에서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곳에 밤마다 술에 절고,
빈곤과 초라의 대명사로 지내던 고흐도 있었는데. 세잔이 늘 가던 카페가 지금도
커피를 팔고 있었고, 그의 가족들이 살던 집은 지금도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그나마
일 년 남지 짧게 행복했던 고흐의 노란 집은 폭격 맞아 박살이 낳고, 그가 머물렀던
정신병원의 방들은 썰렁하게 비워져 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주어진 것만은 아니다. 나름 다 상황이 있고 본인들의 판단과 절제와
의지가 있어 그런 생활이 허락되어진 것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 사는 법이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것이 있던가..) 지금은 그렇게 재미있는 비유가 가능하지만, 그들이
비슷하게 보이는 예술의 종착역에 이르는 길은 이렇게 다르고도 달랐다.

파리에서 귀향한 후에 살던 집 가까이 여기저기서 그림을 시작하다가, 이 아뜨리에가
생긴 후에 정물화를 수없이 그렸다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사과그림.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사과를 놓고 그리는 정물화 다 들 한 번씩 그려보았다.  이것이 다 세잔
덕분이다…) 같은 소재를 그리고 또 그리고.  그렇게 단순할 것만 같은 소재를
집요하게 파다 보니 뭔가가 관통한다.  좁은 캔버스 안에는 그의 무한한 세계가
있었고, 일차원적인 세계에서 삼차원을 넘어 그의 시선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초월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파리에서 기세등등하던 인상파들의 그림들은
이제 그의 경쟁대상이 아니었다. 그중 한 명이었던 피사로를 세잔은 친구이자
멘토로 모셨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피사로, Camille Pisssarro는 참 훌륭한
어른이었던 것 같다. 기록에 따르면 그 당시 가장 기세등등했던 모네, Claude
Monet 가 그렇게 거부한 쇠라, George Seurat를 등단시킨 것도 피사로였다.
지금 같은면 정말 수용하기 어려운 MZ 세대였던 쇠라였다.  그의 무지무지
큰 그림,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를 과감하게
전시회에 건 피사로의 결단이었다고 한다. (뒤 끝 있던 모네로 이로 인해 피사로와
한동안 멀어졌다.) 쇠라의 그 큰 그림은 파리에서 기득권에 외면당하고, 미국의
한 콜렉터에 의해 구매되어 대서양을 건너왔고, 나중에 프랑스 정부에서 다시
살려고 무지 노력했으나 보란 듯이 지금은 시카고 박물관에 걸려있다. (프랑스에서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를 했을까?  기득권들이여, 신세대를 무시하지 맙시다.)
그런 피사로가 세잔도 지극히 챙겼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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