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신앙 강좌: 3일간의 행방, 예수님은 어디에? (강사: 고현권 목사)
1. 들어가는 말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천국과 지옥이 동화나 전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체(reality)로 다가온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의 실체를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하고, 그 최종 목적지가 바로 지옥의 심판임을 깨닫고는 몸서리를 치며,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을 얻은 자신의 최종적인 안식처가 천국임을 확신하고는 감사와 감격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리게 된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면서부터, 신자의 마음속에 밀려오는 간절함은 다른 영혼을 향한 구령의 열정이다. 이 좋은 복음의 소식을 들려주고 싶은 심정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런데, 마음속에 찾아오는 한가지 안타까움은 복음을 전하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이다. 즉,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먼저 떠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쓰리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이 도를 지나치게 되다보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한 어떤 방도들을 찾게 된다. 크게 나누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옥의 실재를 부인하고 일종의 상징으로 처리해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옥의 실재는 인정하지만, 지옥에서도 복음을 듣고 벗어날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영국 복음주의의 대표주자인 John Stott 목사님이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고통 없이 영혼은 깊은 잠을 자게 된다고 부장하며 지옥을 죽음의 상징으로 이해한다.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사에서 종종 있어 왔는데,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 분은 "회복의 목회"로 많이 알려진 이재철 목사님이다. 이 목사님은 문제 많은 한국의 교회 현실에서 정말 성자와 같은 목회와 삶을 실천하고 계시기에, 그의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과 감동을 주고 있다. 필자 역시 그런 이유로 이 목사님을 존경하고, 그 분의 설교를 여러 번 듣게 되었으며, 그 분의 저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3년 전에 그 분이 저술한 성경공부교재와 해설을 보다가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목사님은 벧전3:19-20절을 인용구절로 삼아서, 생전에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자들에게도 지옥에서 다시 한번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John Stott 목사님의 경우, 듣기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죽은 누이가 있었는데, 나름대로 그러한 개인의 역사가 작용하지 않았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이재철 목사님의 설명은 뒤늦은 복음의 전파로 인해, 그 전에 죽었던 조상을 가진 한국적인 상황에서 나름대로 목회적인 고민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처한 상황도, 우리의 개인적인 마음의 감정도, 우리의 문화도 진리의 진정한 척도는 될 수 없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거나,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감동으로 허락하신 진리의 말씀이 보여주고 인정하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신앙의 기준일 따름이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2. 예수님의 지옥강하 교리의 근거라고 여겨지는 구절들
영어로 된 사도신경을 읽은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약간 의아한 한 부분을 발견한다.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로 되어 있는데, 영어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의 장사지냄과 부활사이에 "지옥에 내려가시고"(descended into Hell)라는 어구가 첨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분이 한글 사도신경에는 삭제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초창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신학적인 혼돈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빼 버린 것이 아닌 가 추측될 뿐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이른바 예수님의 지옥강하 교리를 발견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몇몇 구절들이 예수님의 지옥강하 교리를 뒷받침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 근거구절로 생각되는 것들은 무엇인가?
1. 시16:10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바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다."
2. 엡4:8-10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3. 벧전3:19-20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4. 벧전 4:6절: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러한 구절들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3일간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이른바 "지옥강하(地獄降下 Descent into Hell)교리"가 탄생되었다.
3. 지옥강하 교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나 부활이나 승천이나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계심이나 재림과 심판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이고도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따라서, 이런 교리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이 교리는 그 근거구절이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근거구절들이 제시하는 내용도 명확하게 예수님의 지옥 강하를 설명하고는 있지 않기에,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것이 사실이다.
1) Roman Catholic의 설명
Roman Catholic은 지옥강하교리를 설명하기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3일 동안 이미 죽은 성도들의 처소(limbus patrum)로 가셔서 그들에게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이긴 그의 승리의 소식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그 처소에서 천국으로 인도하셨다고 해석한다. 즉,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하였기에, 예수님께서 옛 구약성도들의 영혼들이 머무르는 곳에 내려가서 성취된 복음을 명확하게 설명하시고, 이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2) Lutheran Church의 설명
Luther의 신학과 가르침을 따르는 Lutheran 교회는 지옥강하교리를 설명하기를, 예수님이 지옥으로 내려가셔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사탄에 대한 그의 승리와 영원한 심판을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3) Anglican Church의 설명
Anglican Church 혹은 미국에서 Episcopal Church로 불리는 성공회 교회는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의 실제 의미는 의인들이 거하는 낙원이며, 거기서 의인들에게 완전한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셨다고 해석한다.
4) Calvin과 Reformed Church의 전통적인 설명
로마교회의 잘못된 지옥교리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칼빈과 그를 따르는 개혁교회는 예수님의 지옥강하교리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정확한 성경의 해석에 근거하지 않았기에 진리를 왜곡시켰다고 생각하였다. 칼빈에 따르면, 이 교리는 성경에서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지를 않지만,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는 구절들이 있고, 사도신경에 나와 있기에 어떻게 이 어려움을 극복할까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설명을 내었다. Calvin은 예수님의 지옥강하 교리를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쏟으신 진노와 저주가 너무나 끔찍하여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사실, 지옥을 뜻하는 헬라어 하데스(Hades)는 지옥이라는 장소보다는 "죽음" "무덤"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음부(스올 Sheol)라는 단어도 지옥이라는 장소보다는 "죽음" "무덤"으로 더 많이 사용된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은 지옥이 가지는 의미인 죽음에 거하셨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4. 여러 가지 해설의 문제점들
1) 로마 카톨릭의 죽음 이후에 한번 더 복음을 듣고 반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성경의 교훈과 배치된다. 대표적인 경우는 눅16:19-31절에 나타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설명이다. 거기에 보면, 지옥에 떨어진 부자에게 또 한번 복음을 듣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구원을 요청하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지옥과 천국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상호 건너갈 수도, 건너 올 수도 없다"고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히9:27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선언한다. 따라서, Second Chance를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2) Lutheran의 지옥에 내려가서 사탄에게 심판을 전파하셨다는 해석의 문제는 무엇인가? 신약성경에서 "전파하셨다"(preached)라는 헬라어 단어, "케리그마"(kerygma)는 언제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을 발할 때만 사용되었지, 심판을 선언하는 것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해석상의 심각한 오류가 있다.
3) Anglican의 경우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한 대상을 낙원에 있는 의인들이라고 하는데, 왜 벧전3:19절이 말하는 "옥에 있는 영들"이 "낙원에 있는 의인"으로 둔갑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지 못한다.
4) Calvin과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해석은 다른 어떤 것보다 매우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도 문제가 있다. 만일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이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신 것과 무덤에 3일간 계시면서 지옥의 고통을 맛보셨다"는 것의 상징적인 표현이라면, 굳이 바로 앞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이미 한 말을 왜 또 다시 반복해서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5. 사도신경과 초대교회 공의회에서 고백한 신조들 간의 비교연구
위에서 살핀 것처럼, 예수님의 지옥강하 교리는 성경적으로 명확한 언급이 없고 추론할 수 있는 몇몇 구절로 설명을 시도하다 보니, 각 설명의 나름대로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심각한 오류와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 오늘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접근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 필자는 우선 사도신경에 나오는 "지옥강하" 구절의 기원에 대해서 살핌과 아울러 초대교회에 모든 교회들이 함께 모여서 신앙고백을 선언하였던 몇몇 중요한 신조들간의 비교연구를 통하여 문제해결을 위한 하나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또한 소위 근거구절로 여겨지는 성경구절들을 그 성경구절을 포함하는 문맥 속에서 새로이 접근함으로 보다 성경적인 이해를 해보고자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 사도들과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전 로마제국으로 전파되면서 수많은 회심자들이 생기고, 교회가 빠른 속도로 세워져 가는 동안 교회는 두 가지의 어려움을 당하였다. 외적으로는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요, 내적으로는 이단들의 거짓된 가르침으로 인한 혼란이었다. 사실, 로마제국의 박해는 오히려 참된 신앙과 형식적인 신앙을 구별하여 교회를 더욱 정금같이 순수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만이 가지는 역설적인 진리이다. 교회는 순교와 핍박의 피와 눈물 위에서 왕성하게 성장하는 역설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로마제국의 핍박보다 교회에 더 큰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이단사설의 침투와 그로 인한 혼란이었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다.
초대교회시절 동안 등장하였던 수많은 이단사설들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에 집중되었다. 이단으로 인한 진리의 혼돈이 극심하게 일어날 때마다,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교회들은 대표자들을 파송하여 진지하게 토론하고, 최종적으로 성경적인 진리를 하나의 신앙고백으로 만들어 온 교회가 믿고 고백하며, 진리의 기준으로 삼았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참 하나님이라는 삼위 일체 교리를 확정한 325년의 니케아 신조(Nicene Creed),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심을 확정한 431년의 칼케돈 신조(Chaledon Creed)가 대표적이다. 이 두 가지 신조는 그 내용이 사도신경보다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표현들이 담겨 있기에 사실 오늘날, 교회들이 예배시간에 번갈아 가면서 고백해야할 귀중한 보배임에도 불구하고, 망각하고 있어서 너무나 안타깝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 교회에서 한번 시도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에 비해, 사도신경은 어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문제를 가지고 씨름한 끝에 고백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주후 200년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조금씩 수정되고 발전되다가 주후 750년경에 최종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내용을 담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지옥 강하 교리가 사도신경을 제외하고는 초대교회의 어떤 신앙고백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성령으로 잉태 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 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시며,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신앙고백을 공통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초대교회가 공통으로 고백한 니케아 신조나 칼케돈 신조에는 예수님의 지옥강하만은 고백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단순하다. 예수님에 대한 모든 고백은 성경본문에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는 반면, 예수님의 지옥강하는 성경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시기까지 3일의 기간동안 지옥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였다면, 이는 너무나 중요한 예수님의 사역이기에, 성경에서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일부로서 구체적이고도 확실하게 언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지옥강하를 제외하였던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니케아나 칼케돈 신조처럼 초기와 중기의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의 지옥강하"가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사도신경의 첫 모습은 주후 200년경 위대한 교부였던 터툴리안(Tertullian)의 저술 속에서 발견되어 진다. 그 누가 만든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도신경의 내용만큼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기독교의 성경진리를 압축하여 담은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자연스럽게 사도신경의 내용에 담긴 진리들을 가지고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의 사도신경 내용에는 예수님의 지옥강하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초대교회의 문헌에 사도신경이 자주 등장하는데, 주후 650년까지는 역시 예수님의 지옥강하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주후 650년에 와서야 비로소 사도신경에 예수님의 지옥강하 내용이 삽입되었다. 우리는 왜 이 시기에 와서 사도신경에 전에 없던 예수님의 지옥강하 교리가 슬며시 첨가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약간의 추론을 하자면, 주후 500년 이후 로마교회가 전교회의 영적인 대표자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는데, 아마도 로마교회의 미신적인 요소들이 민간에 퍼지면서 예수님의 지옥강하 교리가 슬며시 자리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모든 초대교회가 함께 고백한 니케아와 칼케돈 신조에도 없고, 사도신경의 초기와 중기까지의 내용에도 없었던 예수님의 지옥강하 교리가 650년 이후의 사도신경에 삽입되어 있다는 것은 이것이 그만큼 성경적인 뒷받침을 받을 수 없으며, 불확실한 내용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셈이 된다. 교회역사를 통해서 살펴보았을 때에 예수님의 지옥강하의 교리는 그만큼 설득력을 가지지 못함을 확인할 수 있다.
6. 성경 본문의 해석
예수님의 지옥강하 교리와 관련하여 근거구절에 대한 수많은 해석과 접근의 시도가 초대교회에서부터 계속 있어왔다. 그러나,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런 구절들이 너무나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믿는 것은 이 말씀 또한 영감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사도 바울의 말처럼, 지금은 희미하게 보일지라도 장차 주님의 날에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온전히 알게 될 날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불분명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다룰 때에, 적어도 우리가 근본적으로 인정해야할 세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우리는 특정본문을 해석할 때에 성경전체의 가르침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해석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그 해석이나 가르침이 성경 전체의 진리와 동떨어진다면, 그것은 배격하여야 할 거짓이다.
둘째, 특정한 구절을 해석할 때에 그 구절의 전후 문맥과 더 넓게는 그 구절을 담고 있는 성경책의 전체문맥과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해석을 하여야 한다.
셋째, 또한 진리가 아직까지 불확실하게 드러난다 하더라도, 좀 더 설득력 있는 내용을 보다 진리에 근접한 것으로 인정하여야 한다. 이런 전제들 하에서 예수님의 지옥강하를 뒷받침한다고 추정되는 본문들을 접근해보고자 한다.
1) 시16:10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바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다." 이 구절은 다윗이 메시아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메시아가 음부에 버림을 당하거나 육신이 썩어 없어질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이 구절은 지옥의 상태에서가 아니라, 죽음의 상태에서 구원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음부"하면 우리는 지옥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음부(스올 Sheol)는 구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무덤이나 죽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더욱이 사도 베드로가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적용하였기에, 이 구절은 단지 예수님이 죽음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서 육체가 썩도록 방치하지 않으시고 부활하실 것임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행2:27-31절) 따라서, 이 구절은 예수님의 부활에 초점을 두고 이해해야 한다.
2) 엡4:8-10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특별히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구절은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이다. 예수님의 지옥강하를 주장하는 이들은 여기 "땅 아랫 곳"(the low part of the earth)을 문자 그대로 "땅 아래 존재하는 지옥"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헬라어 문법을 따져보면, 전문적인 용어로 "동격의 소유격"이다. 즉, 이를 풀어 설명하면, "땅, 곧 아랫 곳"이다. 왜 땅이 "아랫 곳"인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늘이 "윗 곳"이라면, 예수님이 구원사역을 위해 내려오신 이 땅은 "아랫 곳"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구절이 사44:23절이다.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찌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찌어다." 이 구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신 구속사역을 행하심에 대해서 하늘과 땅으로 표현된 온 세계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림을 노래한 것이다. 이때에 온 세상을 표현하는 하늘과 땅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하늘"과 "땅의 깊은 곳"이다. 땅의 깊은 곳은 "땅 밑에 있는 지옥"이 아니다. 어떻게 지옥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즐거워하며 찬양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땅의 깊은 곳"은 하늘과 대칭 되는 지상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당할 줄 안다.
3) 벧전3:19-20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19-20절은 예수님이 지옥에 가셔서 불신앙으로 죽은 자들게 전파하셨다는 가장 확실한 근거구절로 인용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3일 동안 지옥에 내려가셔서 불신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다시 한번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는 근거구절로 인용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에 벧전3:19-20절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서 예수님의 지옥강하를 주장하려 한다면, 이 주장은 엄청난 난관에 부딪힌다. 그것이 무엇인가? 본문에 예수님이 "영으로 옥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하셨을 때에, 그 대상은 누구인가? 모든 불신영혼이 아니라, 오직 노아의 홍수 심판 때에 불신앙으로 죽임을 당하였던 영혼들에게만 국한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지옥강하가 오늘날 지옥에 있는 다른 모든 불신영혼들에게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
위에서 우리가 전제한 내용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떤 구절을 해석할 때에는 그 구절의 앞 뒤 문맥과 그 구절이 담긴 성경책 전체의 흐름과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해석하여야 하지, 문맥을 무시한 채, 특정구절을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예를 들어, 말썽을 부리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그 못된 아들을 향하여 야단을 치다가 분을 이기지 못하여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니, 나가서 죽어라"고 했다고 하자. 만일 전체 흐름을 알지 못한 채, 그 한마디 말만 따서 이해하길, "저 아버지는 의붓아버지이다. 저 아들은 어릴 때에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아들을 향해 죽으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사랑이 없는 아버지이다"라고 해석한다면 얼마나 아버지의 마음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 되겠는가? 그럼으로 전체 문맥과 배경 속에서 이해를 하여야 한다.
자, 벧전3:19-20절이 들어 있는 벧전 3장과 베드로 전후서 전체는 지금 어떤 내용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가? 여러분이 자세히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베드로 전후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온갖 핍박을 당하던 초대교회 신자들을 위로하며 더욱 더 믿음에 굳게 설 것을 권면하기 위해서 쓴 서신이다. 벧전 3장에도 이러한 내용들이 잘 압축되어 있다. 그런데,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노아의 시대에 불신앙으로 죽은 자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의 메시지가 전파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도대체 노아와 핍박받던 초대교회 신자들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갑자기 노아 시대의 이야기가 인용되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이해하는 바는 사도 베드로의 관심은 끊임없이 핍박받으며 고난의 길을 가고 있던 초대교회 신자들이며, 이들이 굳센 믿음 가운데 낙심하지 말고, 소망 가운데 인내할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내용 가운데, 짧은 두 구절에 갑자기 노아와 그의 시대를 언급하였다면, 우리들은 사도 베드로가 노아와 그의 시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고난받는 신자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 인용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즉, 노아와 그 시대의 이야기는 고난받는 초대교회 신자들의 상황 속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노아가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만큼 죄악이 관영하고 타락한 시대 가운데서 홀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의롭게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결국, 홍수 심판에서 단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만 구원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 베드로가 그의 모든 관심을 기울여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 바로, 타락한 로마제국시대에 소수의 남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았던 신자들이다. 다음의 도표를 통해 노아와 베드로가 지금 권면 하는 신자들을 비교해 보면 베드로가 갑자기 노아를 끌어들인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노아: 초대교회 신자들:
1) 그 타락한 시대의 소수의 의로운 자 1) 음란한 로마제국 시대에 남은 소수의 의로운 자
2) 불의하고 적대적인 불신자들에 의해 둘러싸임 2) 대적하는 불신자들에 의해 고통 가운데 둘러싸임
3)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함 3)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있을 것임
4) 노아는 불의한 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함 4) 신자는 불의한 자들에게 담대히 의의 복음을 전파
5) 노아가 최종적으로 구원받음 5) 고난 당하는 신자가 최종적으로 구원을 것임.
이 비교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듯이, 베드로가 갑자기 벧전3:19-20절에 노아와 그 시대를 인용한 이유는 노아와 초대교회 신자들의 믿음의 삶을 비교하고, 노아 시대의 타락상과 로마제국의 타락상을 비교하며, 노아와 초대교회 신자들의 사명과 최종의 소망을 비교함으로써, 초대교회신자들로 하여금 더욱 더 자신의 소명을 인식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물러서지 않고, 복음을 담대히 전하며, 의와 거룩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지옥강하에 대해서 그 어떤 의도도 두지 않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베드로는 벧전3:19절에 엉뚱하게도 우리의 혼란을 일으키는 말씀인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고 말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 우리는 한가지 문제해결의 단서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이다. 문자 그대로 벧전3:19절을 받아들였다고 하였을 때에, 그럼 예수님이 "영으로" 복음을 전파하신 옥에 있는 영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벧전3:20절에 보니, "지금 지옥에 그들 영혼들은 원래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방주를 예비하며 오랫동안 참아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불순종함으로 심판 받은 자들"을 말한다. 바로 이 노아 시대의 불순종하여 결국 심판 받은 영혼들에게 예수님이 "영으로"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말이다.
자, 그럼, 예수님이 "영으로" 노아 시대의 불신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신 때는 언제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직후인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단어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영으로" 전파하셨다는 구절이다. 만일에 우리가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죽으신 직후 육신은 무덤에 장사되고, 영혼은 3일간 지옥에 내려가셨다면, 심각한 반대에 부딪힌다. 그것은 눅23:43절의 말씀과 관련된다.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치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옆에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즉각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 천국에 가 계실 것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으신 직후에 예수님이 지옥에 영으로 내려가셨다는 말은 모순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영으로" 불신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라. 마28:20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을 것을 명령하신다. 그럼, 그 명령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행1:8절에 그 해답이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제자들을 통하여 온 세상 불신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성령을 통한 회개와 하나님의 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은 신약시대에 오순절 사건 이후에만 있었는가? 아니다! 벧전1:11절을 보라!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이미 구약시대에 많은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의와 회개의 복음을 예언하시고 전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잘 안다.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선지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의로 돌아와서 생명을 얻을 것을 강조하였는가? 이 복음의 사역, 회개의 사역, 구원의 사역을 누가 하셨는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시기 전부터 "영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이 복음사역을 감당한 것이다. 벧후2:5절을 보라. 베드로가 노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로 표현하고 있다. 노아는 그 불의한 시대에 하나님을 대항하던 불신영혼들을 위해 하나님의 의와 회개를 선포하던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것이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구약의 참 선지자들은 한결 같이 "여호와의 신이 임하실 때에" 혹은 "여호와의 신이 감동하실 때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 받아 하나님의 의의 복음을 전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이 "영으로" 노아 시대의 불신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하여 노아를 사용하셔서 그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말씀이 된다.
그럼, 왜 베드로는 혼란스럽게 예수님이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표현하는가? 얼른 보면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20절과 함께 자세히 보면 해결된다. 베드로가 노아의 시대의 불신앙자들을 "옥에 있는 영들"(spirits in prison)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서 사용하시는 노아를 통해 복음을 들었을 당시에 지상에 있었지만, 베드로가 말하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분명히 "지옥에 있는 영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나는 현재 믿음 가운데서 열심히 봉사하는 홍길동 집사님을 10년 전에 그가 불신자로 있을 때부터 알아왔다." 지금의 예수의 사람 홍길동과 10년 전 불신자였던 홍길동은 동일인물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지옥에 떨어져 있는 영혼들에게 그들이 지상에서 살 당시에 성령 안에서 노아를 통하여 의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하셨다"라는 의미가 된다.
4) 벧전 4:6절: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이 지옥에 있는 불신영혼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진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눅16:19-31절(천국과 지옥사이에는 깊은 구렁이 있어서 상호 왕래가 불가능함)이나 히9:27절(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문자 그대로, 복음이 전파될 동안에 살아 있었으나 지금 현재는 죽은 자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람들의 궁금증과 맞물려 해석해야 한다. 베드로 당시의 신자들 중에는 복음을 듣고 죽었던 자신들의 동료 신자들에 대한 약간의 궁금증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육신이 죽은 것과 달리 과연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아서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살았을 당시에 복음을 듣고 영접한 사람은 육신의 죽음은 불신자와 동일하게 당할 것이지만, 그들의 영혼은 구원받아 하나님처럼 살 것을 가르치며 위로를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이미 죽은 불신 영혼을 위해 한번 더 복음 전파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복음 가운데 살다가 육신의 죽음을 당한 신자들의 동료와 가족에게 그들의 영혼의 구원이 확실함을 보증하는 위로의 말씀인 것이다.
부가적으로 예수님의 지옥강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몇 가지 다른 근거들을 보면, 우선 요19:30절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죽음의 그 순간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우리의 죄 값을 다 값치르심으로 인해 다 끝나고 해결되었음을 선언하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심판의 실체인 지옥에 내려가실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눅23:46절에, 예수님의 외치심,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라는 말씀은 그가 모든 십자가의 속죄의 고통과 아버지와의 단절의 저주를 끝내신 후에, 그의 영혼을 아버지께서 받아주셔서 아버지의 거하신 곳으로 인도할 것을 간구 하는 기도이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영혼이 지옥으로 내려가실 이유가 없음을 반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