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선 양의 간증입니다. (국민일보에 실린글)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03-07-21 07:54:35    조회: 4,056회    댓글: 0
이젠 더이상 생소한 이름이 아닌 이 지선양의 간증문 입니다.

지금은 이 간증의 내용보다 더 많이 건강해 졌고 얼마전에는
미국에도 와서 간증을 했습니다.
글로써는 좀 길지만 참 귀한 내용이예요. 자매의 삶 자체가 주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참고로 지선양의 홈페이지는 www.ezsun.net 입니다. 많이 회복된 지선양의 사진이 있습니다.

그럼 오늘도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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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아 사랑해"

필자 약력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졸업
△2000년 7월30일 6중 추돌사고로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음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⑴] 만취운전 사고 피해로 온몸 중화상

만취운전 6중 추돌사고(2000.7.30)

앵커:“어젯밤 11시30분쯤 서울 한강로1가에서 서울 후암동 마흔두살 김모씨가 만취 상태에서 갤로퍼를 몰다가 마티즈 승용차 등 6대와 추돌했습니다. 이 사고로 마티즈 승용차에 불이 나서 차에 타고 있던 경기도 안양시 갈산동 23살 이모씨가 온몸에 2도의 중화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갤로퍼 승용차 운전자 김씨는 혈중 알코올 농도 0.35%의 만취 상태였습니다” 2000년 7월30일.

아무렇지도 않게 늘 남의 이야기로만 들어오던 뉴스속 ‘이모씨’가 되었습니다. 그 뉴스속 이모씨의 실제는 뉴스처럼 그렇게 짧지도 간단하지도 않았습니다. 돌이킬수 없는 3도의 중화상이 온몸에 남았고 죽음과의 싸움은 그 ‘긴급 후송’으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올해로 스물다섯살이 된 ‘이모씨’는 1978년 5월24일과 2000년 7월30일 2개의 생일을 가지고 있는 저 이지선입니다.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길에서,귀한 지면을 빌려 이제 겨우 시작한 제 길을, 남보다 조금은 무거운 한 발자국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으로 뗀 그 한 발자국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엄청나고 무서운 불속에서 저를 건지신 하나님과 자기 팔을 태우면서 동생을 구해낸 오빠의 용감함과 사랑에 감사하며 이제 덤으로 사는 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공직에 계신 아버지와 사랑많은 어머니,많이도 싸우고 자랐지만 유별나게 친했던 세살 많은 오빠와 저 이렇게 네 식구가 사는 우리 집은 평범하지만 매우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아빠의 전근지를 따라 부산 대전 대천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대학생이 되면서 경기도 안양 평촌신도시로 이사했고 학교가 가까웠던 오빠와 함께 작은 자동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대학교 4학년이 돼서야 정말 하고 싶었던 공부를 찾았고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여름방학에도 도서관에 다니며 준비했습니다.

제게 두번째 생일이 된,하마터면 사망일이 될 뻔했던 2000년 7월30일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웠던 가족 여름여행을 다녀온 바로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날 주일예배를 마치고 오빠와 저는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참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앉았지만 오빠도 저도 왠지 집중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집에 갈까 말까,저녁을 먹을까 말까,만나서 같이 먹을까 말까…별 것도 아닌 일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흘렀습니다.

그리고 밤 10시10분 학교 후문에서 오빠를 만났습니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날이면 늘 거기서, 그 시간에 오빠를 만나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오곤 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빠를 만나 차에 탔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날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후로는 기억이 나질 않아 오빠에게 들은 이야기를 대신 씁니다)

용산쯤 와서 신호등이 바뀌어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오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뒤에서 “끼익” 하고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러자 오빠가 “어디서 사고나는가 보다”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순간 이미 사고는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⑵] 오빠 도움으로 화염속 기적같이 생존

신호에 걸려 정지해 있던 우리 차에 술을 마시고 이미 작은 사고를 내고 도망치던 갤로퍼 지프가 돌진해와서 충돌했습니다. 우리 차는 그 충격으로 앞차를 추돌하고 튕겨져나와 중앙선을 넘어 건너편에서 오던 차와 다시 충돌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차는 두바퀴 돌아 다시 그 갤로퍼에 쳐박혀버렸습니다. 오빠가 정신을 차린 것은 차가 빙글빙글 돌고있을 때였습니다. 머리 뒤쪽이 후끈하여 일어나 옆을 보니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내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열려진 창문(오빠는 늘 창문을 열고 다녔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으로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빠져나와 조수석 쪽으로 돌아왔습니다. 혹시 제가 그 옆으로 떨어졌는지 찾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때 무심코 오빠가 차 뒤쪽을 보니 흰 양말을 신은 제 다리가 보였다고 합니다. 갤로퍼와 우리 차 사이에 다리가 걸쳐져 있었고 이미 제 상체는 불길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충돌과 함께 연료통이 터졌고 차가 몇 바퀴 돌면서 불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불 위로 떨어졌고 충돌로 인한 충격으로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오빠는 저를 꺼내려고 제 두 다리를 잡고 끌어당겼지만 움직이지 않아 제 상체를 위로 띄우듯 당겨서 저를 끄집어냈다고 합니다. 오빠는 불길에 휩싸인 저를 보고 급한 마음에 불을 끄려고 저를 껴안았습니다. 그때 오빠 팔에도 불이 붙었고 순식간에 피부가 타서 벗겨졌습니다. 그래서 오빠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불을 껐다고 합니다. 불을 다 껐을 때쯤 한 택시기사 아저씨가 수건을 들고와 도와주었을 뿐 사고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빨리 비켜요!차가 폭발해요!”라고 누군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오빠가 바삐 저를 안고 몇 발자국 옮겼을 때 우리 차가 폭발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불과 1∼2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모든 일이,엄청난 일이 ‘순간’에 일어난 것입니다.그리고 잠시 정신이 든 저는 오빠에게 “오빠,지금이 몇 년이야? 2000년이야?”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꿈이라고 생각되었나 봅니다. 무의식적으로 저는 꿈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오빠,나 이렇게 어떻게 살아. 나 죽여줘” 착한 오빠는 제가 아파서 고통받을 때마다 아마 이 말을 되뇌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괜한 짓을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내게 미안한 마음이 든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빠의 슬픈 눈에서,어쩔 때는 눈물을 참기 위해 웃는 그 슬픈 웃음에서 그런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오빠와 함께 TV를 보는데 뮤직비디오에서 애인이 타고 있던 차에 불이 나자 밖에 있던 여자가 어찌할 바를 몰라 울부짖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걸 보던 오빠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저렇게 밖에서 보고만 있어야 되는건데 괜히 꺼내어 가지고 이 고생을 시킨다. 그렇지? 네가 발을 내밀고 있어서 그랬지.으이구∼”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에는 살맛 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백번 잘 꺼냈지!”라고 대답했지요. 오빠가 참 좋아했습니다. 처음엔 저를 구해낸 것이 실수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우리 하나님께서 계속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미 제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이루실 것으로 믿습니다. 이전의 저였으면 믿지 못할,다 이해하지 못할 평안을 맛보게 하시는 분,이 모습이라도 ‘행복’을 느끼게 하시는 분, 이전보다 더 크고 풍성한 것들을 알게 하시고 느끼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소망합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⑶] 중환자실서 지옥같은 죽음과 사투

앰뷸런스가 오고 저와 오빠는 사고 장소와 가까운 용산 중앙대부속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습니다. 우리가 용산 전쟁기념관 옆 신호대기선에 선지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었습니다. 더 이상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주일 밤에 집으로 향하던 남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응급실로 들어갔습니다. 의사들이 달려들었지만 별 방도가 없었습니다. 잠시 기절했던 저는 갑자기 일어나 뜨겁다며 치료해달라고 소리를 지르다 다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의사들이 오빠의 팔을 치료하려고 하자 오빠는 자기는 괜찮다며 동생을 봐달라고 했지만 의사들은 동생은 지금 화상이 문제가 아니라 맥박조차 잡히지 않는다며 이곳에서는 더 이상 해줄 게 없어 화상전문병원으로 옮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제게 산소호흡기가 부착되고 우리는 다시 앰뷸런스를 타고 한강성심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앰뷸런스 안에서 오빠는 끝도 없이 주기도문만 외웠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오빠는 한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저를 안고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습니다. 오빠는 주기도문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다 제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선아 잘가. 너는 너무나 좋은 딸이었고 동생이었어. 누구보다도 예쁘고 착하게 살았고 평생 널 잊지 않을게.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조금만 기다려. 지선아,잘가” 오빠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했을 때 저는 신음소리를 그쳤습니다.

한강성심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호흡조차 잡히지 않았고 뒤통수는 다 찢어져 살이 너덜거렸으며 이미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응급실에 살이 탄 냄새가 진동했고 얼굴도 새카맣게 타서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의사가 오빠에게 치료실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일지 모르니 동생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가라고 했습니다. 오빠가 다시 인사를 하자 저는 부르르 떨던 다리를 멈추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오빠의 인사를 받는 듯했다고 합니다.

잠시후 아빠와 엄마가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아빠가 “지선아,아빠다. 아빠가 왔어. 괜찮을 거야”라고 말하자 의식이 없다던 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고 합니다. 엄마는 어찌해야 할지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저를 보고 서 있을 수도 없었고 딸의 살이 탄 냄새를 맡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날 어찌할 바를 몰랐던,정말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 상황에서

엄마는 응급실 바닥에서 그냥 굴렀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우리 지선이 교통사고 났어. 지선이 죽는대”라며 가깝게 지내는 권사님께 전화를 했고 곧 이모 삼촌 목사님 전도사님 권사님,그리고 집사님들이 병원으로 달려오셨습니다.

아빠는 여기저기 전화를 하시며 가망이 없어보이는 저를 위해 애쓰셨습니다. 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아빠는 의식이 있다며 의사를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제 머리를 깎고 찢어진 뒤통수를 꿰매는 등 응급치료를 하고 온몸을 붕대로 감았습니다. 그렇게 겨우 CT촬영을 할 수 있었고 다행히 뇌는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새벽 4시 폐에 가스가 차서 그것을 빼내는 호스를 옆구리에 박고 저는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아직 살았다고 할 수 없으며 아주 위험한 상태니 계속 지켜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지옥같은 죽음과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⑷] 이 때를 위한 믿음이라

새벽 6시. 사고소식을 듣고 전가화 목사님이 달려오셨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오셔서 엉망이 돼버린 저와 함께 기도를 하신 후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목사님은 한 20분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채 앉아 계셨습니다. 사선을 넘는 고난을 겪으셨던 목사님께서도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차마 엄마를 위로할 수도 지선이가 괜찮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어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 때를 위한 믿음이라,이 사건을 위한 믿음이라’. “10년이 넘게 하나님을 믿어온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간의 신앙생활과 지금 가진 믿음이 이 어려운 때를 이겨나가기 위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어려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그럴 때마다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고 힘이 되었으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제가 교회를 처음 다니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친구가 전도를 해서 아파트 상가에 있는 교회를 다녔는데 가족 모두가 다니지 않는 상황에서 매주 열심히 나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벼운 병인 줄로만 알고 입원하셨던 외할머니가 폐암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됐습니다. 의사도 손쓸 수 없는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옆에서 간호하시던 이모할머니의 권유로 모든 가족들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믿음생활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많이 아주 많이 아팠습니다. 이미 병원에서도 포기한 상태로 퇴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좋아졌다가 나빠졌다를 반복했지만 6개월이 최고라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2년을 우리와 함께 더 계셨습니다.

실로암…아주 오래된 찬양이지요. 제가 처음 들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할머니는 실로암 찬양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이 불렀었지요. 그리고 기도원에서 잘은 못치지만 할머니 앞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이 찬양을 불러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정말 앙상하게 뼈밖에 안 남은 우리 할머니는 “우리 지선이 많이 예뻐졌네”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이 할머니와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할머니는 고단한 삶을 뒤로하고 정말 평안한 얼굴로 하나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그때는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왜 그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할머니를 데려가셨는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지난주 교회에서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그리워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해서…너무나 감사해서 눈물이 줄줄 흘러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울었습니다. 할머니는 정말 많이 아팠지만 우리 가족 모두의 실로암이었습니다.

실로암 그 연못에서 눈을 씻어 주님의 이름으로 소경이 눈을 떴던 것처럼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우리 모두는 할머니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새로운 참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너무 아팠지만 우리 가족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알려주고 떠난 할머니의 삶은 그 누구의 삶보다 귀한 것임을 압니다.

기도합니다. 부족한 저도,제 고난도 누군가에게 실로암이 되게 해달라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그 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도구로… 저도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볼 수 있게 하는 주님의 실로암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⑸] 끔찍한 현실에 죽음도 결심 

사고가 난뒤 며칠 동안은 전혀 기억이 없는데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정신이 돌아올 무렵의 기억인 것 같습니다.

어디선가 ‘웅’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빙글빙글 도는 것 같기도 하고, 보이진 않지만 누군지 모를 여러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습니다. 우습지만 저는 외계인에게 잡혀서 우주선을 타고 실험을 당하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게 뭐지? 꿈인가? 자고 있나? 이게 뭐지?”그러다가 “누가 구급차좀 불러주세요! 지선아 괜찮아,괜찮을 거야”라는 너무나 다급하게 울부짖는 오빠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습니다. 시끄럽고 정신없는 사고 현장의 소리가…. 그 끔찍한 소리만이 제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습니다. 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꿈이 아닌 일이, 내게 뭔가 아주 큰일이 일어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고구나. 사고가 났구나. 내가 다친 건가봐” 그때 그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너무 당황스럽고 무서운 그 기분. 무섭다는 말 한마디로는 표현이 안되는 느낌…. 공포였습니다.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지나온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죽으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르고 정신도 혼미할 때였는데 어떻게 그런 못된 생각까지 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산소호흡기로 목을 눌러 산소가 들어오지 못 하게 해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될리가 없었지요. 그래서 몸에 어떤 줄이 달려 있길래 그걸 뽑으면 죽게 될까 싶어서 발가락으로 당겨서 뺀 것이 나중에 알고보니 겨우 소변을 받아내는 줄이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지요.

이렇게 내 힘으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자 가스펠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뒤에 가사는 생각지도 않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 싶다고 그렇게 천국으로,하나님께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부르고 또 부르며 정신이 있는 동안은 계속 불렀습니다. 너무 무서워서,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께 가고 싶다고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찬양을 하고 있을 때 믿음의 집 식구들과 시온성가대, 또 사랑하는 가족들의 간절한 기도가,뿌려진 눈물이, 안타까운 마음들이 하늘 보좌를 흔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끊임없이 불렀던 찬양 가사처럼 고통 가운데 주님을 만나 이렇게 살아서 찬양과 감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고,전하고,증거하며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라고 하나님은 제게 그런 계획이 있으셨나 봅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⑹] 병원서 생존 어려운 환자로 분류

사고후 며칠간 저는 의식이 있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타버린 몸이 부어오르기 시작해 눈,코,입까지 부어올라 정말 쳐다보기 어려울 만큼 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면회시간에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온몸이 부어올라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게 손발을 묶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엄마가 발을 묶은 끈을 풀어주어 발로 글씨를 썼습니다.

“여기 어디?” “병원이야,중환자실이야. 지선이가 다쳤어…” “언제 만나?” 엄마와의 첫 대화는 그랬습니다. 그전에 친척 한 분이 중환자실에 계셨던 적이 있어서 중환자실은 면회가 제한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 것 같았습니다. 엄마는 하루에 세 번, 30분씩 만날 수 있었습니다. 면회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정작 엄마를 만나는 시간은 너무 짧아서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 것이 중환자실에서 있는 동안 화상 치료만큼이나 힘들었습니다.

또 가족에게는 제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저는 사고 당시 눈에 콘택트 렌즈를 끼고 있었습니다. 얼굴이 까맣게 타버렸는데 눈 안에서 렌즈가 녹아버린 것은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이젠 지선이가 살아도 앞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온 가족이 걱정했습니다.

몸이 퉁퉁 부어있었기 때문에 렌즈가 녹았는지 확인할 수 없는 며칠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난지 4일째 되던 날 부기가 조금 가라앉으면서 전혀 녹지 않은 렌즈를 꺼낼 수 있었고 그것을 간호사가 엄마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제 눈을 지켜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심한 화상의 경우 대개 1주일이 생사의 갈림길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병원에서는 저를 살 가망이 없는 환자로 분류하여 간호 스테이션에서 가장 가까운 침대에 두었습니다. 제가 2층 중환자실에 있던 40일간 그 침대에 있었던 환자 중에 살아서 나온 사람은 저 하나였습니다.

1주일이 생사의 고비라는 그동안 폐에 차 있던 가스를 제거하는 관도 빼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의사 선생님이 제 가슴을 두드리며 “이제 숨쉴 수 있지? 혼자서 숨쉴 수 있지?”라고 물으셨고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목안 깊숙이 박혀있던 산소 튜브를 뽑아내었습니다. 그때의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엄마와 말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 나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살기 위한,살아남기 위한 싸움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었습니다. 매일 아침 지옥같은 화상치료실에서의 치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타버린 피부조직을 긁어내는 수술조차 금방 해주지 않았을 만큼 여전히 저는 살 가망이 희박한 환자였습니다. 그러나 저를 위해 눈물로,금식으로 기도해주셨던 정말 많은 분들의 사랑의 힘이 있었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죽음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곳에서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며 제게 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글로 전하고 있습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⑺] 극심한 수술고통…찬양으로 극복

저는 계속 헛것을 보았습니다. 누워있는 그곳이 병원으로 제대로 보이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수술을 하면 안 아프게 될 줄 알고, 또 수술을 하면 이제 중환자실을 나가게 될 줄 알고, 그렇게 기다리던 첫번째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수술은 타버린 피부와 죽은조직을 긁어내는 수술이었습니다. 애타는 마음으로 뭔가 더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부모님은 수술실 앞에서 의사의 입으로부터 설사 살게 되더라도 사람 꼴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손가락도 다 절단해야 한다는, 너무나 냉정한 현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기절했고, 저는 고통가운데 소리를 지르며 비린내가 진동하는 몸으로 수술실에서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죽은 조직을 걷어내니 치료는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매일 아침 제가 받아야 했던 화상치료는 감겨있는 붕대가 잘 떼어지도록 물로 적시고, 가위로 서걱서걱 잘라내고, 모든 상처부위를 소독 물로 씻어냅니다. 약이 잘 발라지도록 물기를 또 닦아냅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그 위에 다시 약을 바르고 붕대를 다시 감는 것으로 치료가 끝이 납니다. 말은 이렇게 몇 줄의 설명으로 끝나지만, 피부의 55%가 없었던 그 당시 제가 느꼈던 고통은 아주 오랫동안 눈물 없이는 떠올릴 수 없는, 생각만으로도 모든 세포가 벌벌 떨리는, 그런 기억입니다. 그 곳은 정말 생지옥이었습니다. 어이없게 다친 사람들이,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는, 실제로 마약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강한 진통제를 맞고도, 그냥 차라리 거기서 딱 미쳐버렸으면, 차라리 정신을 잃어버렸으면 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돼지의 마음이 이럴 꺼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철저히 혼자가 되는 시간마다 저를 지켜준 것은 찬양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죽어야 했지만 그 죽음과 같은 시간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며 끊임없이 찬양을 들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찬양 속엔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힘이 있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놀라지 말라”.

모두가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는 그곳에서 저는 단 한번도 소리 질러 본 적이 없습니다. 치료를 하던 치료사들이 “지선이가 베스트”라며 칭찬을 할 정도로 저는 이를 악물고 참았습니다. 발가벗겨져, 피부도 없이 그곳에 누워, 소리마저 질러버린다면 정말 저조차도 제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저는 매일 치료 받는 동안 기도했습니다. “지금 하는 치료가 감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소독일 뿐이지만,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믿음으로 몸을 담구었던 것처럼, 이것이 헛되지 않게 하시고, 저를 하나님께서 치료하시옵소서”.

아팠던 이야기를 하자면 이 지면을 다 써도 다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 모든 고통은 하나님만 기억하시길 원합니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뿌려졌던 눈물과 피와 고통의 기억들은 나를 구원하실 여호와 하나님만 기억하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다만 제가 경험했던 그 곳은 ‘끝이 있는 지옥’이었음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끝이 있는 지옥은 차라리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삶이 끝나 천국에 갈 때에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이 떨어지게 될 그곳은 ‘끝이 없는 고통의 지옥’이라는 것을 더욱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하기 원합니다.

또한 잊을 수 없는 것은 매일 아침 새벽기도를 마치고 한걸음에 달려오시는 김순호 목사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밤새 헛것을 보고, 1시간 조차 잠들지 못한 제게 목사님은 아침마다 시편의 말씀을 읽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위로였고 선포였습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⑻] “살아야 겠다”…악착같이 먹어

시간이 얼마간 지나고 치료실에서 뒤통수를 꿰매었던 부분의 실을 뽑아내느라고 저를 일으켜 앉혔는데 그때 제 눈으로 제 다리의 상처를 보게 됐습니다. 붉은 생살과 피,그리고 생닭에서나 봤던 노란 지방덩어리와 하얀 뼈까지….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저 “나는 살지 못하겠구나…”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다음날 밥을 먹이시는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에게도 마음의 준비를 시켜야 할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먹는다는 게 의미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엄마는 그럴수록 더 먹어야 한다고,다음부터는 절대로 상처를 보지 않기로 약속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한 숟갈 한 숟갈 떠먹일 때마다 기도를 하셨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에 살을 입히시고 가죽을 덮으시고 생기의 영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이것이 지선이의 살이 되게 하시고 피부가 되게 하시옵소서”

저는 열심히 먹었습니다. 제가 거기서 그런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면회시간이 끝난 뒤에도 계속 먹어야 한다고, 많이 먹어야 빨리 살이 차올라서 이곳을 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쁜 간호사님들의 온갖 눈치를 받았지만 저는 죽을 힘을 다해 먹었습니다.

밤마다 양 옆 침대에 누운 다른 환자들이 혼수상태에 빠지고, 긴급상황이 벌어지고,죽어 나가는 상황에서도, 커튼 뒤로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그 순간에도 저는 계속 먹었습니다. 마음이 약해질 수 없었습니다. 나는 살아서 나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중환자실 문앞에 와서 기도하고 가시는 수많은 분들의 눈물과 기도에 보답하는 길이었습니다.

실제로 빠른 속도로 살이 차올랐고 그곳에서 두번째 수술인 피부이식 수술(양팔,오른쪽배,허벅지)을 받고 36일만에 중환자실에서 준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36일동안 그 중환자실에서 18명의 환자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데 저를 살아서 그곳을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사명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전우라고 부르는그분들(중환자실은 실제로 전쟁터였습니다)을 생각해서라도 저는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내기 원합니다.

머리부터 온몸이 미라처럼 붕대로 감긴 저는 그곳에서 더 이상 여자도,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 보호받아야 할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기 누워 바쁜 의료진을 이해해줘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토록 감염 위험 때문에 가족과 만나는 면회시간도 제한시키면서 너무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병실 안에는 벌레가 날아다녔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제 눈은 감기지 않았었고 피부가 없는 얼굴에서 계속 진물이 흘러서 눈은 언제나 뿌옇게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날아다니던 벌레가 내 눈에 내려앉았고 정말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저는,눈 한번 깜짝 할 수 없는 저는 누군가 와서 쫓아주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벌레 하나 쫓을 수 없는 나…. 많이 비참했습니다. 7개월 뒤 눈을 감을 수 있게 되기까지 저는 아주 오랫동안 날아다니는 벌레만 나타나면 벌레를 쫓아달라고 소리를 지르곤 하였습니다.

9월21일 세번째 이식수술을 위해 피부를 얇게 떼어내고 붙일 부분을 고르게 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제가 지르는 비명소리에 마취에서 깨어나 “엄마 아파∼ 아파∼”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참던 저도 별 수 없었습니다. 찬양 테이프를 틀어달라고 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 높임을 받으소서’라는 찬양이 나오고 울부짖던 제 소리도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울면서 따라 불렀습니다. 나를 지키실 분,나를 건지실 단 한 분. 만왕의 왕 되신,천지의 주재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⑼] ‘양쪽 손 절단’말듣고 깜짝 놀라

사고 후 두달만인 9월28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일반 병실로 옮겼습니다. 여전히 많은 상처가 있었고 얼굴은 그대로 피부없이 나오긴 했지만 이제 오랜 시간 그렇게 그리워했던 가족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껏 찬양을 들으며 기도받을 수 있고 예배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누울 곳도 제대로 없었는데 네 식구가 3일동안 한 병실에서 잤습니다. 너무 좋아서,너무 감사해서 제가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얼굴에 피부이식을 받기 위해 성형외과로 옮겼지만 계속적인 의료 분쟁 사태로 의사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고 어쩌다 그렇게 어렵게 만난 의사는 자신의 피곤함을 저와 가족에게 퍼부어댔습니다. 이미 바닥이었던 우리를 땅속 끝까지 밀어넣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옮겼으나 의료파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수술은 계속 미뤄졌고 이식했던 상처들까지 다시 녹아버려 더 큰 상처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파업이 끝나고 의사들은 돌아왔지만 얼굴을 덮을 만한 피부가 여유롭지 못하다며 수술은 또 다시 기약없이 연기됐습니다.

12월7일 병원을 옮긴 지 두달만에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양손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 모두 한마디 정도를 절단하기로 한다는 ‘절단동의서’를 쓰고 말입니다. 그때 오빠가 들고 온 종이에 지장을 찍으면서도 저는 그게 절단동의서인줄 몰랐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간호사가 “양손 절단동의서 확인하셨죠?”라고 하는 말을 듣고 엄마에게 놀라 물었습니다. 그때까지 오른쪽 손가락만 절단하는 줄 알았거든요.

“왼쪽도 하는 거야?”“응”

그리고 잠시 후 하나님께서 제 입술에 어떤 말을 주셨는지 아세요?
“엄마,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해야지”
제 마음은 처음부터 제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은 줄 수도,알 수도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뼈까지 완전히 타버려서 도저히 살릴 방법이 없기 때문에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는 마지막 결정을 들은 날 밤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손가락은 짧아지더라도 손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당시 팔에 이식한 피부가 땅겨 제 힘으로는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수보다 못한 손이 되지 않게,부끄러운 손이 되지 않게, 제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제 왼손은 새끼손가락을 제외하곤 거의 정상입니다. 왼손은 오른손보다 손가락도 조금길게 남았고 많이 상하지 않아서 저는 이제 왼손잡이가 되었습니다. 왼손이 오른손 같지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오른손도 왼손처럼 편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 부끄러운 손을 기쁘게 사용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이 부끄러운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이 손으로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악수도 하고 손을 흔들며 인사도 합니다. 그리고 엄지로만 치고 있지만 이 손으로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는 글을 씁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불쌍한 손이지만 하나님은 제게 이 손이 부끄럽지 않다는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 손을 부끄러운 손이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⑽] 거울엔 낯선 내 얼굴이 비치고…

14시간의 긴 수술끝에 손가락을 절단하고 얼굴에 인조피부를 이식했지만 인조피부는 녹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진통제 주사 3대로 겨우 버텨가며 하루 네번 피부 없는 얼굴에 피부 대신 덮어놓은 거즈를 뜯어내고 새 것으로 바꾸는, 지금도 상상조차 하기 싫은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진통제조차 마약 중독의 의혹(?)을 받아가며 눈치를 보고 또 보며 사용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그 병원의 의사는 내게 피부의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나같은 화상환자를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수술해야 할지도 몰랐던 듯합니다.

결국 2001년 2월 언제 끝날지 모르던,늘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뒷걸음질만 치던 것같은 광야생활을 끝내고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병원을 옮겨 드디어 얼굴에 피부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7개월만에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고,세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고 또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정대로였다면 몸의 피부이식을 끝내고 사고 후 2개월 정도였으면 얼굴피부 이식수술을 받고 새 얼굴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문제로 저는 7개월만에 새 얼굴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사고가 제게 일어났고 저는 얼굴 전체를 잃었습니다. 저는 방에 있는 거울을 치웠고 목을 들 수 없게 돼 거울조차 보기 힘들었지만 저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밤에 유리창에서,밥을 먹다가 숟가락에서 저는 문득문득 저를 보곤 했었습니다. 오래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고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몇 달이 지나면서 멀리서나마 거울에 비친 저를 바라보게 됐습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어색함을 이기기 위해,마음과 생각을 지키기 위해 낯선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 이지선”

거울 속의 새 지선이도 인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더 가까이 내게 익숙해지며 새로운 나와 친해져 갔습니다.이제 다시 얼굴 수술을 하지 못해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돌던 광야생활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때는 이유를 다 알 수 없었던, 그러나 한 순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은 적이 없었던 2001년의 겨울 그 광야…. 매일 만나를 주셨지만 정작 예비하신 그 땅에는 데려가 주시지 않았던 그때를 저는 광야라고 칭합니다.

저는 그 광야의 의미를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기도했었습니다. 섭섭한 마음에 제게 광야의 의미를 설명해달라고, 하나님이 나를 고치실 것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던 제게 그 광야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하나님을 증거할 때 온전히 감사한 마음으로 증거할 수 있도록 내 모든 그리고 아주 작은 섭섭한 마음이라도 없앨 수 있게 제게 알려달라고, 그 안에서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믿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집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과연 사고 후 석달 만에 새 얼굴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면… 그렇게 옛날 네 얼굴에 대한 모든 기억이 생생할 그 때, 언제나 거울을 보면 당연히 보이던 네 모습이 여전히 머리에 남았을 그 때…거울로 너무나 달라진 새 얼굴을 보게 된다면…지금처럼 이럴 수 있었겠니? 감사할 수 있었겠니?”

7개월의 광야생활동안 하나님은 이전의 나를 완전히 지울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지울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훈련되지 못했다면 이 모습으로라도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원망부터 하며 ‘하나님 왜요?’ 라는 질문만 퍼부었을 나약한 제 자신만이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섭섭함을 떨쳐내 버렸습니다. 감사할 수밖에 없게 하시는,제게 늘 감사의 조건과 환경을 허락하시는, 그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내 영혼을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모습이라도,지금 모습으로도,행복할 수밖에 없게 하시는 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⑾] “하얀 눈보며 살아 있음을 감사”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돼버렸지만…가고 싶은 교회도,성가대도,학교도 맘대로 갈 수 없지만…그렇게 모든 걸 잃은 것같지만…나약함 가운데,상처투성이 몸 가운데 짧아진 손가락에도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며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찬양하고 싶은 마음을 주십니다. 제가 기도했던 모습은 아니지만…하나님은 삶을 누리게 하시며 큰 일보다는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며칠 전부터 산책을 시작했어요. 병원 로비에서 뛰기도 하고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 밀기도 하고 거의 한달만에 밖에 나갔어요. 병원 나무에 걸린 크고 아름다운 트리 장식도 보았고 흰눈이 펑펑 내리는 것도 봤어요.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살아있어서 흰눈도 보게 하시고 추운 겨울을 다시 맞게 하시니”(2001년 1월11일).

얼굴에 피부 대신 거즈를 덮고 있던 시절,끝이 없을 것같은 병원생활을 하던 2001년 겨울 제가 처음으로 2개의 엄지 손가락으로 병실에서 쓴 글입니다. 그 해 생애 최고로 아름다운 눈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 잠든 밤,밖에 나가서 쐰 차가운 바람 속에서 저는 살아있음을 느끼며 무한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저희 가족에겐 광야와도 같았던 그곳 구로병원에서 만나게 해주셨던 병원 목사님과 사모님은 하나님이 저희 가족에게 보내주신 사랑이고 위로였음을 기억합니다. 이 지면을 빌려 두 분께 정말 가슴 깊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늘 견딜 만한 힘을 주셨고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그해 2월 제게는 너무 귀한 의사 선생님인 오석준 원장님을 만나 다시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드디어 얼굴에 피부이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수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이식한 피부를 고정시키느라 수백개의 스테이플러가 박혔었지만 그걸 떼어내는 아픔 이후로는 더 이상 치료는 제게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치료 카트 바퀴가 구르는 소리만 들리면 나를 치료하러 오는 소리인 줄 알고 초긴장하며 떨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2001년 3월7일 저는 드디어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글은 퇴원하던 날, ‘가출소녀 이지선, 7개월만에 컴백홈∼!’이라는 제목으로 썼던 글입니다.

“지난 여름밤 돌아오려던 집에 계절이 3번째 바뀌고서야 이렇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현관에 들어서며 사진 한장 찍고 그리고 이제 환자복이 아닌 제 옷을 입고 침대가 아닌 의자에 앉아 글을 씁니다. 전도사님이 오셔서 예배도 드렸습니다. 제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가출 안해본 사람은 잘 모를 거예요. 그리고 방금 전 너무너무 멋진 화분 하나가 배달되었어요. 퇴원을 축하한다고 시온성가대 지휘자님께서 보내주셨더군요. 너무너무 감사해요. 매주 거르지 않고 병원에 꼭 와주시고. 정말 긴 병에 효자 없다는데 하나님 사랑은 절대 그렇지가 않네요.

저는 알아요. 제가 이렇게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제가 잘 참아서가 아니란 걸요. 모두의 사랑과 눈물어린 기도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는걸 알아요. 감사해요. 아직 모두 끝난 게 아니지만 이렇게 행복한 날 맞게 하시고 더 기쁜 날을 소망하게 하신 주님. 온몸에 남은 상처, 짧아진 여덟개의 손가락. 이 모든 것은 주님이 날 사랑하신 증거, 하나님이 다녀가신 흔적임에 감사합니다.

거울 보기 겁나는 얼굴. 10년후에 제가 사고 얘기를 하면 “전혀 몰랐어요. 화상당하셨었어요? 이 얼굴이?”라고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치유받길 소망해요. 10년후에요. 얼굴만이라도요. 덤으로 사는 인생. 처음부터 버렸던 욕심,이제 와서 주섬주섬 담고 불행해지지 않도록 기도할 거예요.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2001년 3월7일)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⑿] 이식피부 당겨 찢어질듯한 고통 

이식한 피부는 자꾸만 작아지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이식했을 때의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없어져가고 당겨져서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갖게 합니다. 퇴원하고 집에 돌아와서 살이 당기는 찢어질 듯한 고통에 아침마다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제 스스로 ‘고달픈 나의 인생’이라고 할 정도로 집으로 돌아와서 느끼게 된 기쁨만큼이나 이겨내야 할 현실은 참으로 고달픈 것이었습니다. 이식받은 피부가 가려워서 잠도 푹 잘 수 없었습니다. 목과 턱은 완전히 당겨져 내려가서 흘러내리는 침 때문에 입에는 늘 손수건을 물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흘리는 게 더 많아서 밥먹을 때는 수건을 깔고 먹어야 했고 당겨지는 피부를 늘이기 위해 매일 물리치료와 운동을 해야 했습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관절과 근육이 굳어버리기 때문에 게을리할 수 없었습니다. 늘 동생이 손을 못쓰게 될까봐 걱정하는 오빠랑 매일 싸우고 울며 달래고 애원하기를 반복하며 운동을 했습니다.

현실은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제겐 소망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애원하고 매달렸을 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어느날 저녁 저는 안경을 끼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안경없이 보았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그렇게 웃다가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평범한 스물네살짜리 여대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꿈을 꾸어야 합니다. 영화 같은 사랑 얘기에 가슴 들뜨기엔…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날 밤 저는 엄마에게 교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엎드려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 어떡하실 거예요.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하나님 살아계시잖아요.
전지전능하시잖아요.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

그 다음날 주일 예배때 저는 찬양을 하다가 속이 상했습니다. 저 무대 위 성가대 자리가 아닌 여기 이 자리에서 남에게 보일까 봐 모자를 눌러쓰고 가면을 쓰고 흐르는 침 때문에 수건을 입에 물고 앉아 있는 현실이 혹시나 꿈은 아닐까. 내가 아주 긴 악몽을 꾸는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 말도 안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이 속이 상했습니다.

찬양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고 뭐고 저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들려주세요. 이제 저 어쩔 건지 말씀 좀 해주세요”

찬양이 끝나고 목사님 설교가 끝났습니다. 목사님이 단상에서 내려와 제 옆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두 팔로 감싸안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선아. 내 사랑하는 딸아. 내 너를 세상 가운데 세우리라.
아프고 병든 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상했던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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