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에 대해서..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04-12-17 21:17:32    조회: 2,722회    댓글: 0
얼굴의 주름살이 더해 가고, 젊었을 때의 생기 있던 나의 외모는 사라져도, 나이를 먹을수록, 생각의 깊이가 늘어가고,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는 법에 무게가 생기고, 그 분의 생각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부르심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렸을 때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이상한 나라의 폴'과 '말괄량이 삐삐'를 매우 즐겨 보았습니다. 밥 먹다가도 프로그램이 시작하면 넋을 놓고 보아서, 아예 밥상을 치우고 엄마와 함께 보았던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폴'은 시간을 멈추고 여행을 시작한다는 설정 자체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폴이 좋아하는 니나라는 예쁜 친구가 마왕의 손에 잡혀갔는데 폴이 니나를 구하러 들어갈 때면 언제나 모든 시간과 상황이 멈춰지기 때문입니다. 폴이 이상한 나라를 헤매는 동안 현실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폴이 여행에서 돌아오면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요. 폴이 멈춰진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멋진 세계에서 일을 마치고 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입니다.

'삐삐를 부르는 화난 목소리, 삐삐를 부르는 다정한 소리, 삐삐를 부르는 상냥한 소리, 삐삐를 부르는 산울림 소리' 이 노래를 얼마나 목청 높여 불렀는지 모릅니다. 힘이 센 삐삐, 무엇이든지 잘 하는 삐삐, 긴 다리를 가지고 있는 삐삐, 줄무늬 양말이 잘 어울리는 삐삐, 자신감이 강한 아이 삐삐.

어렸을 때 '나도 폴처럼 시간을 멈추고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면, 주위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나만 아는 시간 속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처리해 놓고 다시 현실로 짠~ 하고 돌아왔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삐삐처럼 힘도 세고 못하는 것도 없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이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생선 뼈까지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는 강한 이와, 말도 들어 올리는 엄청난 팔힘,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상대와 맞붙어도 절대 지지 않는 백전백승의 자세, 그것이 나의 평범하고 나약한 일상 속에 얼마나 큰 충격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12월입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해 놓은 것도 없이 이렇게 또 한 살을 먹는구나' 생각합니다. '올 한 해 내가 무엇을 했던가' 라고 생각해 보면 잘 했다고 생각되는 일보다 아쉬운 일이 더 많습니다. 거리에 캐롤은 울려 퍼지고, 연말이라고 분위기는 들뜨는데, 나 자신만 소외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이렇게 나이 먹어도 될까' 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 사라지지 않는 날도 있습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늙음에 대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년기에 누구나 다 한 번쯤은 갖게 되는 고민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결혼과 직장,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 할 올바른 삶에 대한 고민들이 나에게 커다란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그러한 종류의 고민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없습니다. 그저, 나 자신을 다스리는 법, 그 분에게 의지하는 법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처절하고도 오랜 고민 뒤에 오는 해답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믿습니다. 얼굴의 주름살이 더해 가고, 젊었을 때의 생기 있던 나의 외모는 사라져도, 나이를 먹을수록, 생각의 깊이가 늘어가고,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는 법에 무게가 생기고, 그 분의 생각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부르심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며칠 전, 또 한 해가 가고 나이 먹는 게 슬프다 말하던 내게, 얼굴만큼 생각도 마음도 예쁜 열세살짜리 여자아이가 해맑은 눈으로 내게 말했습니다. "근데, 나이 먹는 게 왜 슬퍼요?" 왠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 슬픈지, 왜 아쉬워하는지 말입니다. 늘 내 힘으로 하려 한다고,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욕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폴처럼 시간을 멈춰 시간 여행을 떠나 내가 원하는 사람, 내가 원하는 직장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멈춰있지만 나만 질주할 수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잘하는 삐삐처럼, 그 선천적인 뛰어남을 부러워하며 나의 약함을 한탄해서도 안됩니다.

그렇지만 눈에 확연히 드러나 보이지는 않아도, 내가 가진 모습 그대로 그 분이 천천히, 하나하나씩 이루어 나가시리라 믿습니다. 그것이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했다 아쉬워하며 2004년을 보내는 올해 끝자락에, 내가 나를 다스려가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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