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열쇠, 폴 세잔 5/6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24-05-30 10:11:35    조회: 911회    댓글: 0
여기서 다시 고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잔은 당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고흐의 존재를
알았지만 교류는 없었다. 파리에서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프로방스에서의 교류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렇지 않았겠는가… 안타깝지만. 세잔에게 고흐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경매에 나온 그림들의 판매가를 보면 고흐의 그림이 월등히 높다.
세잔은 출중한 습작이 어마무시하게 많고 (전 세계에 세잔의 그림이 없는 박물관이 있던가? 
고흐의 그림은 어디에 한 장만 있어도 주야장천 선전을 한다.) 나름 소유하기도 쉬웠을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돈이 찾아가는 구조는 다르기만 하다. 가끔은 정말 미술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는, 돈의 가치에 따라 예술을 평가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세잔의 이러한 미술에 대한 영향은 엄청났다. 당시 젊은 나이에 이미 인정받고 있던
Picasso나 Braque 같은 예술인들이 세잔의 그림에 멘붕이 와버렸고, 세잔의 그림에서
그들이 고민하던, 고전적 원근법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그림 속 공간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힌트를 찾았다. 세잔이 구축한 색채를  대신해 그들의 관심이었던 사물표현울
도형으로 대체한다. (이 또한 미술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방식인 것이다.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는 회귀가 또 한 번 이들을 통해 일어난다.) 그것이 그들이 찾은 원근법을
포기하는 대신에,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도형으로 구축하는 특히 작은 상자로 구분하는
큐비즘을 발전시키게 된다. 알려진대로 사물을 쪼갠다기 보다는 단순화된 도형으로 근본을
다시 구축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 시작이 어디인줄을 알면 피카소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렇게 그들은 세잔에게서 시작한 평면에서의
공간구축을 시작하게 된다. (바로 이 곳에서 사람들은 미술에서의 길을 잃어버린다...너무 과격한
그림들은 시도차원에서 나온 것들이 많으니 구지 이해할 필요는 없다,, 실험이었을 뿐이니 )

 이 시점에서 원근법의 의미가 무언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근법의 관습은
미술을 관람할 때 시각적 상호작용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그 말은 그림을 보는 시선은 고정이 되고,
시각적 상호작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말은 단지 한 장소,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한명의
관찰자를 향해 현실의 모든 이미지가 정돈된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관습으로 인해 눈으로
보는 현실을 넘는 예술가의 직관력을 표현하기엔 원근법은 커다한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세잔은 조심스레 그 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한 땀 한 땀, 한 삽 한 삽 온전히 그 돌을
치운다. (그에 비해, 고흐는 죽기살기로 붙어 한번에 옮기는 시도를 했다.)  이유가 있는
세잔의 움직이었고, 그 과정은 치밀하고 계획적이었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니 같은 고민에
도착한 예술가라면 세잔의 고민과 해결책은 명쾌했을 것이다. 

얼마나 둘의 생각이 비슷했으면 이 당시 피카소와 브라크가 그린 그림은 너무 흡사해
누가 그렸는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바로 이 시점에 현대미술의
물꼬는 터져버리고 일반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Contemporary Art의
세계는 열려버렸다. 그렇게 봇물 터지듯 열려 버린 현대미술의 세계는 이것이  똥인지
오줌인지 구별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시도가 여기저기서 넘쳐나고,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 져 버렸다. 아마 그 예술가에게는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그림은
풍경이나 사물에 대한 착시효과를 흉내내는 것 밖엔 되지 않는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확고히 만들어 지고 있었다.  이건 비단 미술세계뿐 아니라 모든 예술이나 철학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가장 정리되고 앞서 있는 미술세계가 눈에 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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