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믿는다는 것” 제 1 강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18-09-11 11:41:43    조회: 957회    댓글: 0
2018 필라델피아 기쁨의 교회 가족 수양회

강사: 강영안 (미시간 칼빈신학대학원 철학신학 교수, 서강대 명예교수)

주제: “믿는다는 것” 제 1 강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먼저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사십니까?”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이 질문을 받으면 그리스도인들은 망설임 없이 세 가지를 말할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으로 산다고 말이지요.  이것이 지난 이천 년 기독교 역사의 전통입니다. 서양 전통에는 사추덕(四樞德, four cardinal virtues)이 있습니다. 정의, 지혜, 용기, 절제, 이 네 가지 덕을 이렇게 부릅니다. 영어로 이 네 가지 덕에 ‘Cardinal’이란 말을 붙인 까닭은 이 네 가지 덕이 삶의 중추(中樞)가 되기 때문입니다. ‘추기경’이란 말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서양의 이 전통에 기독교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 흔히 ‘신학적 덕’(theological virtues)라 부르는 덕이 덧붙여져 ‘일곱 가지 덕’(七德)이라 부릅니다. 

믿음, 소망, 사랑, 곧 신망애로 돌아가 보십시다.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소망은 미래와 연결이 됩니다. 사랑은 아무래도 현재와 연결된다고 하겠습니다. 옛날에 사랑했다. 앞으로 사랑하겠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현실로 보일 수 있는 것은 지금 하는 사랑입니다. 믿음은 어떻습니까?  앞으로 믿을 것이고 지금도 믿지만 믿음의 시작은 역시 과거에 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 셋 가운데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사랑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본성으로 하는 사랑은 ‘자기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 가족, 그리고 이웃으로 확대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자전적인 소설이 있습니다. 아들이 죽고 한 달 동안 먹지도 못하고 지내다가 딸이 이혜인 수녀가 있는 ‘분도 수녀원’으로  모셨습니다. “왜 흠이 하나도 없는 내 아들을 하나님이 데려가셨는가?”하는 물음을 품고 매일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수녀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수녀가 동생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생각을 바꾸어 잘해 주니까 사이가 좋아지더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박완서 선생도 ‘왜 내 아들이라고 하나님이 데려가지 않으라는 법이 있겠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녀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그에게 일종의 ‘생각의 균열’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옆방에 들어온 부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수녀로 보낸 딸이 병이 생겨서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해서 수녀원에 들어와 하루 자면서 이 부부는 속이 상해 잠을 자지 못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찾아온 부인을 방에 들이지 않고 복도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라고 말했더니 그 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여인의 고통에 약이 되게 하려고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나요?”라고 박완서는 하나님을 원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그 날 점심으로 나온 카레밥을 퍼먹고는 배탈이 나 변기 앞에 꿇어 앉아 모두 토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문득 계시와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는 평생 불우이웃돕기와 같이 남을 돕는 것을 우습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식, 자기 가족만을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이 일이 있은 뒤,  세 가지 현상이 생겼습니다. 1. 수녀들이 환자의 대소변을 담은 요강을 마치 화병을 안고 들고 가는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2. 밥 냄새가 코에 들어왔습니다. 한참 뒤 이 일을 회상하면서 그 때에 예수님이 밥이 되어 그에게 찾아와서 “애야 나를 먹어라 했다.”고 후기에 적고 있습니다. 3. 타자를 돌보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고통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고통을 통하여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웠다고 박완서는 말합니다.

사랑의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1. 하나님 사랑, 2. 이웃 사랑, 3.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망은 어떻습니까? 살전1:3에서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믿음에 덧붙여 ‘역사’(役事)를, 사랑의 경우에는 ‘수고’를, 소망과 관련해서는 ‘인내’를 말합니다. 이 때 소망의 대상을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라고 덧붙여 두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습니까? 믿음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 기쁨의 교회 예배당 건물 안에 앉아 있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만일 5분 후에 이 건물이 무너진다면 여기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저녁 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하실 때 의심을 가지고 하셨습니까? 여기 앉아 강의를 듣든지 밥을 먹든지 불신이 있으면 강의를 들을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습니다. 여기 앉아 제 강의를 들으려면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제가 진실 되게 이야기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누구도 이것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철학을 하거나 신학을 하거나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말이 있습니다. “혐의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 어떤 말을 듣거나 텍스트를 읽을 때 일단 우리는 텍스트의 의도가 무엇인지 혐의를 가지고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이나 텍스트에는 진실이나 진리보다는 오히려 권력이 언제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작용한다는 의식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말을 들을 때나 방송을 들을 때, 어떤 중대한 발표가 있을 때 일단 의혹, 의심, 혐의를 가지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러한 마음가짐을 한시도 놓지 않고 가지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내일 아침 일어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잠자리에 듭니다. 신뢰 없이, 믿음 없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논어를 보면 공 선생님(孔子)이 無信不立(무신불립)이라고 했습니다. 나라에 군대가 없을 수도 있고 식량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 만큼 믿음, 신뢰를 중시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건물이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믿음, 음식에 독이 없으리라는 믿음은 오랜 경험이나 무조건 하는 신뢰에 기초한 것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실망할 수도 있고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기초로 해서 우리 삶과 관련된 것들을 믿습니다. 논리학으로 이야기하자면 ‘귀납법’이 여기에 깔려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추측하거나 확증이 되지 않을 것을 그럴 것이라고 수용하는 태도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구스타프 융이 BBC기자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Do you believe God?)” 융은 잠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 분이 누군지 압니다(I know him).” 융은 앎과 믿음을 대비시켰습니다. 앎은 ‘확실한 지식’이고, 믿음은 ‘대체로 그렇다’고 믿는 태도를 두고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서양말의 믿음(belief, believe)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내일 두 번째 강의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만 기독교신앙과 관련해서 믿음을 이야기할 때 믿음의 의미는 단지 추측하거나 그렇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믿음은 확실한 지식이요, 신뢰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을, 누구를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 때 우리에게는 분명히 먹을 대상이 있습니다. 먹을거리가 우리의 먹는 행위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대상은 무엇이며, 누구입니까?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문서가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우스신경, 그리고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영어로 Apostles' Creed라고 합니다. Creed는 Credo, 곧 “내가 믿습니다.”라는 라틴어 동사에서 왔습니다.

5세기의 루피누스가 전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최초로 해설한 사람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충만 이후 세계 선교를 위해 흩어질 때 공통으로 고백하는 신앙을 확인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옵고”라고 하니 안드레가 이어서 “그 외아들 우리 주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리고  요한이 이어서 “이는.....” 이런 방식으로 마지막에 사도로 편입한 맛디아가 “영생을 믿습니다”로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사도신경과 비슷한 형식이 보이는 경우는 문헌상으로 AD 150년경으로 거슬러가는 것을 보면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신앙 고백의 산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숨볼룸 아폴스톨로룸’( Symbolum Apostolorum)입니다. “사도들의 표지”, “사도들의 배지”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표지, 배지가 필요합니까? 사도신경은 원래 세례식에 나온 신앙고백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전능한 아버지 되시고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그러면 세례를 돕는 부제가 세례 받은 사람을 물속에 퐁당 집어넣었다가 건져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그러면 다시 물에 집어넣었다가 끄집어냅니다. 세 번째로 “당신은 성령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그러면 다시 물에 넣었다고 건져냅니다. 그리고는 세마포 옷을 입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표시를 하게 됩니다. 사도신경은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표시요, 일종의 암호입니다. 이 암호를 알면 안으로 통과시켜주고, 알지 못하면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역사적 기원의 관점에서 보면 ‘숨볼룸 아포스톨로룸’은 “사도들의 암호”라 부르는 것이 그 뜻을 가장 잘 살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도신경을 통해서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세 가지 입니다. 1. 전능하신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2.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3. 성령을 믿습니다. 루터의 대교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을 보면 사도신경의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명확하게 밝혀두었습니다. 좀 더 세분해서 말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전능하신 아버지 되시고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나는 믿습니다. 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시고, 우리의 주이심을 나는 믿습니다. 3. 성령 하나님께서 보편 교회를 세우시고, 성도의 교제를 가능케 하시고, 육신의 부활을 가져 오시고, 죄를 사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나는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분이 어떤 분이심을 믿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지적할 것은 기독교 신앙은 추상적 교리나 사상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교리나 이법이나 원리나 진리나 어떤 사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선다 싱이 자기의 교수로부터 기독교에서 무엇을 찾았냐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했더니, 예수 그리스도 말고 어떤 진리, 어떤 도리를 알게 되었냐고 되물었습니다. 선다 싱은 “어떤 교리가 가르침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 이법이나 도리, 진리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사물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인격을 영어로는 person이라고 합니다.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파악할 때에 반대되고 대조되는 말을 찾아야 합니다. Person에 반대되는 말은 thing입니다. ‘사물’입니다. 나는 person이고 펜은 물건입니다. 펜을 인격화해서 “그 놈 참 좋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펜은 분명히 인격이 아닙니다. 생각할 수도 없고 판단할 수도 없고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이라 할 때 하나님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대상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달리 하나님은 완전한 분(Perfect Being)입니다. 능력과 지혜와 사랑이 완전한 분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무한한 분입니다. 어떤 한계가 없습니다. 능력과 지혜와 사랑이 무한한 분입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다릅니다. 이 분이 천지를 지으시고 섭리하시고 죄로 부터 인간을 구원하고 진리를 알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 분이 우리에게 전능하신 아버지 되시고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성도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시고 죄를 사하시고 육신의 부활과 영생을 가져오시는 분입니다.

다시 요약을 하겠습니다. 믿음은 두 가지를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에는 믿는 행위가 있고 믿는 대상이 있습니다. 믿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삼위 한 분 하나님께만 신뢰를 두는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 믿음의 대상은 삼위 한 분 하나님입니다.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신뢰를 엉뚱한 곳에 두게 되면 우상을 만들어 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偶像)의 ‘우’는 ‘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돈이나 스포츠나 건강이나 어떤 다른 무엇에 우리의 절대 신뢰, 우리의 궁극적 신뢰를 두게 되면 그것이 마치 하나님과 비슷한 신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짝뚱 신’을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교회나 민족, 국가도 잘못하면 이런 짝뚱 신,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해야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나라와 민족도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믿으려면 우리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비판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은 본향으로 걸어가는 긴 여행입니다. 이 여행길을 걸어가면서 엉뚱한 곳에서 헤맬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제대로 믿고 있는지, 무엇을 누구를 믿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해야 짝뚱 신을 섬기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절대적입니다마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우리가 제대로 믿고 있는지 종종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세 번 남은 강의가 여러분께 그런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기쁨으로 하나님이 주신 삶을 누리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감사 가운데 할 수가 있습니다.  (손갑원 정리, 강영안 교수님 수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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