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교회의 자아상 [1]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04-01-30 10:48:24    조회: 3,983회    댓글: 1
선교와 교회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교회론을 정립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벌써 오래전의 일입니다. 얼마전에 그런 주제의 글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건전한 생각을 갖게 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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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교회의 자아상”
박성일 (필라델피아 기쁨의 교회 담임)

지역교회(local church)가 효과적인 선교동원을 이루려면 우선적으로 바른 교회관이 형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와 선교동원가가 이 교회관을 이해하고 각자 맡은 일들을 충성되게 수행할 때 건강한 사역의 열매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목회자와 선교동원가 사이에 불필요한 마찰이 일어나고 서로 불신하는 안타가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회자는 성도의 관심사를 지역교회로부터 다른 것으로 돌려놓는 듯한 설득력 있는 선교동원가에게 부담을 느끼고 선교동원가는 반면 목회자들이 선교적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불만을 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선교동원이 일어나야 하며 또 그 일의 가장 기본적인 현장이 지역교회라는 것을 부인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교회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쉽게 표현해서 교회를 선교를 후원하는 기관이 아니고 선교적 공동체라는 역동적인 이해를 말합니다. 타 문화권을 복음으로 접근하는 일이나 해외 선교를 하는 것이 아주 특수하고 비일반적인 헌신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고 이것은 곧 교회로 존재하는 그 사실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역교회 지도자들은 내향화(ingrown)된 자세(즉 교회의 자원을 그 자체의 확장-숫자, 건물, 등-을 위해 소모하는)를 견제해야 하며 동시에 선교동원가들은 선교의 협소한 정의에 따라 해외선교만이 최상의 것으로 생각하는 자세를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해외선교, 타문화 전도 등의 관심이 하나님의 나라의 전반적인 이해 속에 포함되어야 하고 또 교회에 대한 전반적(holistic) 이해가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선교는 교회의 사명이기 보다 성경적인 교회로 존재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선교를 한다 (church doing missions)가 아니고 교회는 선교다 (church is missions)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교회관의 정립

교회론을 바르게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가는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모이고 또 세상으로 파송되는 역동적인 공동체입니다. 일차적으로 교회를 건물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깨트려야 할 것입니다. 예배당은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난, 교제의 장소로써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또 그분의 대 제사장적 사역으로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성전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 현장에 이미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 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지 건물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교회의 존재 형태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로써의 역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존재합니다. 모이는 교회는 예배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equipping) 역할을 합니다. 흩어지는 교회는 사회 속에 빛으로 비추고 소금처럼 스며들어 사역하는 것입니다. 내향화 된 교회는 사역을 모이는 교회로만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자 훈련의 목적도 결국 훈련된 자들이 다른 제자훈련 반을 인도하도록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모이는 교회의 사역은 교회 전체의 사역에 10분의 1도 안 되는지 모릅니다. 사실 대부분의 성도의 삶의 현장은 직장과 가정이지 모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물론 모이는 일에 힘쓰는 명분으로 매일 예배당에 살다시피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업과 가정을 소흘히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역이 아니고 실제적인 사역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모여서 훈련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4:12에 나오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훈련된 사람은 삶의 현장으로 나가서 사역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 성직이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성도가 땀 흘리며 수고하는 모든 노동은 신성하고 그러한 생산적인 삶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건강하고 건전한 지체들이 지역사회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그 자체가 교회로써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구약 이스라엘의 회복이며 교회는 그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 있는 과도기의 형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교회를 향하여,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말씀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지상에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세우시는 과정에 시내산 앞에서 선포하신 말씀(출19장)을 인용하여 교회에 적용한 것입니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표현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머리된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이시고 왕이십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이 세상에 두신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는 엄청난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의 정체를 사실적인 것으로 서술합니다. 그렇게 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한다가 아니고 몸이다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가 아니고 빛이다입니다. 또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가 아니고 소금이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현실을 이 세상에 보일 수밖에 없는 선교 공동체(missiological community)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 있는 그 자체가 선교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참 교회"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속성을 설명할 때 4가지로 이야기합니다. (1) 교회는 하나이다 (Church is one).  (2) 교회는 거룩하다 (Church is holy).  (3) 교회는 사도적이다 (Church is apostolic).  (4) 교회는 우주적이다 (Church is catholic).  전통신학이 이러한 교회의 속성(the attributes of the church)을 수동적으로 또는 정적으로 이해했을 때 교회는 한 기관(institution)으로써 딱딱하고 소극적인 모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일치성을 로마교회는 정치적 조직적인 의미로 생각하였고 개신교는 교회의 영적 일치성으로 만 보았습니다. 또 교회의 거룩함을 성과 세속의 구분을 통하여 이해하려고 했을 때 교회가 세상과 담을 쌓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사도성을 로마교회는 교황을 통한 사도성의 전수로 보았고 개신교는 사도가 증거한 말씀에 대한 강조가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교회는 우주적이라 하는 것을 로마교회는 역시 전 세계적 조직망을 통하여 이해하려 하였고 개신교는 불가시적(invisible)교회의 통합적 존재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institutional 하게 이해하기 보다 missiological 하게 이해한다면 이러한 교회의 속성을 좀더 능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일치성을 그리스도의 교회 머리되심을 중심으로 몸이 서로 연결되어 성장해 나가는 모습으로, 교회의 거룩성을 성화되었고 성화되어가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교회의 사도성을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선포의 의미로, 그리고 우주적 교회에 대한 이해를 교회의 다양화, 즉 국가적, 인종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확장되어가는 교회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적인 것이며 건전한 교회관을 세우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선교적인 존재로 인정된다면 교회로 하는 모든 것은 선교적 존재의 자기 표현이 됩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어느 구체적인 표현에 더 우선 순위를 갖고 노력해 나가야 하는 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선교적인 교회가 아니다, 또는 선교보다 교회가 우선이다 등의 주장은 넌센스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성숙과 사역 현장의 요구와 세계를 향한 복음증거의 기회 포착에 따라 우선 순위가 정해 질 수는 있지만 이것은 정직한 상황 평가와 정보 나눔을 근거로 행해져야할 전략의 문제입니다. 근본적으로 교회가 무엇을 해야하느냐 하는 질문은 아닌 것입니다.
             
2. 교회의 사역

[A] 모이는 교회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모이는 교회로써 전 인격적인 사역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몇가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1) 예배: 예배는 요한계시록 4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그의 다스리는 백성들이 나아가 모든 영광을 그에게 돌리고 찬양하며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장차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함께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종말의 현장에 매 주일 성도는 경험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입니다. 예배를 전도의 수단으로 보려는 노력이 요사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배가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고 경험하는 것이라면 예배의 현장에 참여한 불신자나 구도자가 성령의 조명 안에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를 인정하고 참여하고 경험하는 예배의 integrity를 무시한 전도집회적 예배의 이해는 근본적인 의미를 상실케 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진정 예배에 충실한 교회는 선포적 공동체의 역할을 그 자체로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2) 기독교 교육: 교회 교육의 핵심은 정체성 확립(identity formation)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다" 라는 의식을 갖도록 말씀을 통하여 이해시키는 과정입니다. 바른 정체성은 바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실 복음의 선언은 무엇을 하라는 윤리적 명령이기 이전에 너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3) 청지기 훈련: 정체성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오직 창조주 되신 하나님만을 주인(왕)으로 모시는 삶을 실천합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을 통하여 우상을 섬기는 잘못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돈, 지위, 학벌 등 내가 얻은 것들은 나의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효과적인 삶을 살기 위하여 허락하신 자원(resource)이라는 의식과 함께 이 자원들을 어떻게 바르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청지기 훈련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삶의 방식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참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4) 지도력 개발 및 은사 발견: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하여 사람들을 모집(enlisting)하고 훈련(equipping)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역교회는 이러한 모집과 훈련의 장입니다. 각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도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상관없는 일들을 사역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 그러므로 가치 없는 일을 위하여 지역교회의 중요한 자원들을 허비하는 것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사역을 위하여 필요한 사람이 세워지고 훈련을 통하여 성숙하게 되는 것은 지역교회에 있어서 절대적인 사역입니다.

(5) 공동체 설립: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공동체 설립의 목적은 지역교회가 섬기는 지역사회에 선교적으로 존재하기 위함이며 동시에 선교적 정체성을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하기 위한 자원의 발굴을 위함입니다. 초대교회의 공동체 의식이 얼마나 선교적 결과를 나타내게 되었는가를 사도행전의 기록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B] 흩어지는 교회

모이는 교회로써의 역할과 함께 흩어지는 교회로의 역할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지역교회로써의 정체성과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통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시너지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1) 파송: 모이는 교회는 흩어질 때마다 파송을 선언합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 명하십니다. 어떤 분들의 파송은 매 주일 반복적이지만 어떤 분들은 장기적으로 타 지역, 또는 타 문화권으로 파송 받고 몇 달, 몇 년이 지나야 다시 모이는 교회의 따듯함으로 돌아옵니다. 후자를 우리들은 "선교사"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풀타임으로 타민족의 복음전도 및 복음전도 지원 (infrastructure ministry) 사역을 위하여 지구촌 여러곳으로 파송된 사람들입니다.

(2) 점검/Accountability: 파송된 분들은 시시때때로 공동체와의 연결을 통하여 자신의 사역에 대한 적절한 점검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점검 기구(accountability structure)가 형성되지 않으면 서로를 지켜주는 check and balance가 이루어지지 않고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되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부패성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도 날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자기를 점검하지 않으면 안되고 이 점검을 서로 해 줄 수 있는 공동체적 accountability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영적 상태, 재정의 사용, 관계 관리 등에 대한 지속적인 점검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공동체 의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Free agency가 난무하는 선교운동은 건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3) 대화/Networking: 각 지역교회 사이에, 또 각 선교사들 사이에, 또 지역교회와 선교사들 사이에 지속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화를 통하여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필요를 채워주는 일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눈을 들어 일상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관점이 열려야 하며 선교사들은 교회를 통하여 오는 자원의 공급과 사랑의 교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시대의 변천과 함께 소위 정보시대가 우리 앞에 열려 있습니다. 정보시대의 단점도 있지만 장점은 이제 세계가 작아지고 지역적인 거리를 초월하여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오직 참여를 요구할 뿐입니다.

저는 이 글 통하여 교회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교회는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곧 선교이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교회를 너무 좁은 시야로 보거나 선교를 너무 특수한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가시적인 표현으로써의 교회의 역동성을 강조하며 선교적 교회의 모습을 그려 본 것입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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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홈페이지에서 목사님의 칼럼을 대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선교적 교회의 자화상"을 읽고 바른 교회의 모습과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과 역활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깨달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