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묵상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04-01-07 13:41:07    조회: 1,491회    댓글: 0
처음으로 시도한 신년새벽기도회에 대하여 귀한 feedback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석하신 분들 모두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집사님께서 부탁하신 말씀요약을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요나서 말씀 묵상: 주님과 동행하는 정돈된 삶]

첫번째 묵상: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주전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을 여로보암이 다스리던 때에 활동하였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시대적으로 상당히 환영받았던 선지자였다고 추측됩니다. 열왕기하 14:23-27에 의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국가적 부흥을 예언했고 그것이 성취되는 보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민족의 선지자"로 추앙 받는 인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치 초대교회를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사방으로 흩으시듯이 하나님께서 요나를 불러 당시 부상하는 강대국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민족의 선지자가 이방 나라, 그것도 이스라엘의 적국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거북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거북스럽게 생각한 이유는 적국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4장2절 이후에 보면 그는 자신의 선포를 통하여 니느웨가 회개하고 심판을 모면하게 되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니느웨가 망하면 이스라엘은 더욱 부흥할 것이라는 생각이었겠지요.

한가지 놀라운 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너무나 정면으로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확실히 안다면 절대로 순종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는 (1)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2) 지금 명령하시는 분이 분명하게 하나님이신줄도 알았습니다. (3) 그 하나님의 명령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확신하고, 그 말씀의 내용도 또렸하게 이해했다면 왜 거부했을까?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고민합니다. 그런데 이런 전제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가면 사업이 성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학교에 원서를 내면 합격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과 결혼하면 두말없이 행복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미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아가서 투자, 진학, 결혼 등에 대하여 문의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과 그 뜻을 순종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룬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현실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일반인들의 가치관으로 측정되는 성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의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복을 받는다"가 아닙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복이다"가 맞습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그와 동행하는 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사는 것 그 차체가 복된 삶입니다.

사실 요나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쫒기 위하여 하나님을 배반할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서도, 그가 하신 말씀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밝히 알면서도 거부하고 귀를 막아 버리고 자신의 욕심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순종할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까?

마음에 깊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나의 큰 행복이다" 인정하지 못하면 순종은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애인의 웃는 모습,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어떤 희생이라도 감당하는 사람은 진정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그 자체가 나에게 큰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 방에 불을 키면 싫듯이 하나님의 존재가 거북스러워 질때 나에게는 불행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주님, 이번 한해는 주님의 말씀이 무엇보다 달콤하게 느껴지고, 주를 위한 희생이 너무 보람되게 느껴지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가 너무 가슴을 벅차게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기쁨으로 확신되는 그런 한해가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가정도, 사업도, 직장도, 교회생활도, 모든 관계들도 "순종"의 현장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


두번째 묵상:

우리는 요나서를 보면서 이렇게 얘기 합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더니 봐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지 않았니. 거 봐라, 까불더니 그렇게 됐구나. 아 그런데 드디어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니느웨로 갔구나. 잘했다 정말. 그럼 그래야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 더 행복해 보이고 니느웨에 가서 성공적인 부흥회를 마치고 모두 회개하는 현장에서는 무척이나 괴롭워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는 상황을 무릅쓰고 은혜 충만한 모습인데, 니느웨에서는 너무 분해서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기본적인 문제는 니느웨에 갔느냐 안 갔느냐 하는 순종의 문제 이전에 다른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가끔 이런 모습을 주위에서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몇가지의 standard 헌신의 요구로 (헌금, 봉사, 심지어는 새벽기도 참석) 축소하고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면서 하면 복받고 하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모습입니다. 결국 인간의 욕심을 충동질 해서 마음에도 없는 헌신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밑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 같이 깊고 또 깊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별 희안한 일도 다 하는 것입니다. 이단 교주들은 이런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의 문제는 순종 이전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와 인격적인 communion을 갖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상태에서도 요나는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요나를 통하여 다시스로 가던 배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니느웨 성의 사람들이 회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는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Sinclair Ferguson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Beware of mistaking usefulness to God for communion with God" (내가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 받는 다는 것을 그분과 교통/교제/사귐/동행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특히 목사 처럼 영적인 사역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조심이 요구됩니다. 어떤 경우는 설교 한편에 성도들이 은혜 받고 얼굴이 밝아지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신앙적인 만족감을 누릴 때가 있습니다. 집회를 인도하고 성도들이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영적으로 괜찮은 상태에 있다고 스스로 안심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함정이 될 수가 있습니다. 사역에 성공한다고 내가 지금 주님과 의미있는 교제를 나누고 있다고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내면 세계의 질서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대체적으로 심령 중심부터 율법주의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일한것을 가지고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요나가 없다고 니느웨 회개가 불가능합니까? 도대체 요나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요나가 없어도 누구를 통해서든지, 어떤 상황을 통해서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루어 내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그토록 달달 볶고 계시는 것입니까? 왜 요나를 볶아서라도 같이 가시기를 원하십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서의 하나님은 요나를 멀찍히 파송하시고 결과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그는 요나가 가는길에 같이 가고 계십니다. 요나가 원해서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지중해 한 복판에 폭풍을 동반하시고 따라 가십니다. 물고기 뱃속에서도 요나의 심각한 독백을 듣고 계시고, 니느웨에서도 요나와 문답 형태의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요나서에 그려진 하나님은 그의 사람 하나를 만드시기 위하여 도주하는 사람이라도 추적하여 설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요나를 향한 마음, 니느웨를 향한 마음, 그리고 타락한 인류를 향한 마음. . . . 결국 요나의 사건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의 예표로 그려지도록 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기적, 즉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 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을 자신에 대한 예언이라고 수차례 언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와 시간을 보내며 그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것을 참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아이들의 행복은 같이 놀아주는 부모에게 있습니다. 가끔 큼직한 선물 하나씩 떨어트려 놓고는 "야 나가놀아라"하는 부모는 좋은 부모가 아닙니다. 만일 비싼 선물 보따리에 만 관심이 있는 아이를 키워 놓았다면 결국 인격의 형성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비싸고, 좋은 것만 밝히는 물질주의적 속물을 만들어 놓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같이 가자고 손 내미십니다. 심부름만 시키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같이 다니시면서 말씀 나누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성도는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좋아서 하시는 일을 같이 하기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입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도 성경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배운다고 하지만 배워도 딴소리 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 감상에 젖어, 자기 식대로 자기 말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변화되지 않고 변화를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자기집착의 결론이 그렇듯이 결국 영적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세번째 묵상: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폭풍, 물고기, 박넝쿨과 벌레를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서에 드러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요나서의 선교적 아젠다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사랑하지 못하는 니느웨 사람들의 영혼을 아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것은 그가 창조한 인간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샀다가 혹시 하나라도 갯수을 적게 받아 왔으면 무척 억울해 합니다. 세일 광고를 들고 갔는데 하루 늦었다고 거부 당하면 너무 안타까와 합니다. 돈 몇 천불, 몇 백불만  누군가 떼어 먹으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새차에 처음으로 scratch가 가면 너무 마음 아파 합니다. 박넝쿨 처럼 삶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 하나에 대해서 너무 애착을 느끼고 아쉬워 합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해서, 영혼에 대해서는 너무 느낌없이 지나칩니다. 새차에 scratch 나는 것은 안타까와 하면서 영혼에 scratch 나는 것은 쉽게 넘어갑니다.

영혼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싫어지면 모든 봉사가 피곤해 집니다. 사람이 싫어지면 모든 헌신이 아깝게 여겨 집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밤을 같이 새고도 모자릅니다. 그런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30분을 내 주는 것이 아깝고 피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면 영혼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먼저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실 이 두 계명은 둘이 아닙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의 원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하면 네 이웃을 네 자신의 영혼 같이 사랑하고 아끼게 되리라.

영혼구원을 위해서는 투자가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계속 아내, 남편과 자녀들을 위하여 가정을 아름답게 세워 나가는 일에 충성합시다. 지치지 말고 . . . . 교회 공동체를 세웁시다, 지치지 말고 . . . . 복음 사역, 영혼 구원 사역에 투자 합시다, 낙심치 말고 . . . . 우리 자녀들 얼마나 아름답게 보입니까? 그들이 거듭나고 예수님 영접하여 회심의 은혜를 누리도록 맘껏 투자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리고 땅끝까지 구원을 선포하고 영혼을 건지는 것에 투자하는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투자하는 것도 잊지 맙시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삶의 가장 큰 가치로 인정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아름답게 합시다. 정돈된 삶을 만들기 위하여 시간과 물질도 투자해 봅시다.

2004년 한해를 통하여 진정한 성공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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