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지 사랑 - 북 리뷰 [1]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07-11-21 18:53:01    조회: 2,700회    댓글: 1
벌써 오래전에 "목회와 신학"지에서 원고 부탁이 들어와 썼던 글인데 인터넷에 떠 있더군요. 혹 루이스 독자들게게 도움이 될까 해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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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사랑
 
 저자 | 역자 : C. S. 루이스(C.S. Lewis) | 원광연 
 출 판 사  : 생명의말씀사
 출 간 일 : 2001-03-05
 판형 | 사이즈(mm) : 신국판
 쪽 수 : 
 가 격 : 6,000 ?nbsp;
 
 
C. S. 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전능자의 사랑

박성일 _ 필라델피아 기쁨의 교회 담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겸임 교수


사랑을 주제로 한 시나 노랫말은 많이 있지만, 사랑의 속성을 해부하고 설명하는 글을 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의 몸을 해부해 연구한 의학책을 저술하기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런데 옥스퍼드대학교의 문학 비평가이자, 20세기 대표적인 기독교 지성인 C. S. 루이스는 자원해 이 작업에 뛰어들어 「네 가지 사랑」이라는 기독교 클래식을 저술했다. 과연 어떤 동기가 그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한 것일까?


사랑은 기독교 윤리의 핵심

일단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58년 초에 루이스는 미국 성공회 방송 기관으로부터 육성으로 녹음된 방송물을 제작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아마 십여 년 전에 루이스의 기독교 변증(나중에 「순전한 기독교」로 편집되었음)이 BBC 방송을 통해 영국인들에게 전파돼 큰 호응을 얻었던 사실을 근거로 미국에서도 방송을 기획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방송사측에서 루이스에게 전적인 신뢰도를 보이면서 방송물의 내용에 대해 스스로 결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루이스는 선뜻 이에 응했고 자신이 나누고 싶었던 내용을 ‘스톨게’, ‘필리아’, ‘에로스’, ‘아가페’로 표현될 수 있는 ‘네 가지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이런 사랑의 속성에 대한 고찰은 기독교 윤리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게 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루이스는 불과 몇 개월 만에 “Four Talks on Love”라는 제목으로 원고를 완성했고, 이어 1958년 8월에 영국에서 녹음해 미국에서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그 후 이것이 카세트테이프로 제작돼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루이스의 육성을 담은 것으로 판매되고 있다. 루이스는 그 내용의 중요성을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곧바로 원고를 재정리하고 그 위에 살을 붙여 내용을 보충했으며, 1960년 3월에 「네 가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빛을 보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루이스의 생애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육십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던 루이스가 조이 데이비드맨 여사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당시 조이는 골수암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루이스는 병원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던 조이에게 청혼하고, 그녀의 병실에서 눈물겨운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조이를 병원이 아닌 자신의 주택에서 눈을 감게 해 주겠다는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이 일어났다. 암의 세력이 주춤해지면서 회복기에 들어간 것이다. 루이스는 결혼한 1957년 3월부터 조이가 죽은 1960년 7월까지 약 4년 동안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슬픈 시간을 보냈다. 바로 그 시기에 「네 가지 사랑」이 씌어졌다.
루이스는 조이와의 관계가 발전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처음에 조이를 긍휼히 여김으로 시작해 우정에 이르게 되었으며, 결국 에로스적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삶의 체험을 통해 오랫동안 문학 속에서 만났고 또 스스로 그려 보던 사랑의 여러 모습들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조이와의 결혼을 통해 두 아들(조이와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얻고 아버지로서 첫 경험을 시작한 것도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 긍휼, 우정, 이성 간의 애정과 초월적인 아가페 사랑에 이르기까지 이론과 경험이 어우러진 완벽한 고찰이 가능했던 것이다.


사랑을 절대화하면 우상

우리는 「네 가지 사랑」의 첫 장을 여는 순간, 루이스의 깔끔하면서도 꽉 찬 느낌을 주는 문장들을 대하게 된다. 루이스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마치 장편의 시를 읽는 것 같다. 산문이지만 시처럼 단어와 단어(즉 의미와 의미) 간의 간격이 좁다. 이는 불필요한 단어의 설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특히 독자들은 「네 가지 사랑」을 읽으면 산문을 시처럼 쓴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장을 대충 넘기면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없다. 한 단어, 한 문장을 음미하면서 읽어내려 가야 한다. 그리고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 안에 예리한 통찰력이 번득인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루이스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네 가지 사랑」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꼭 기억해야 할 키워드는 ‘사랑의 속성’, ‘사랑의 종류’, ‘자연과 은혜의 관계’, ‘기독교 윤리’이다.
첫째,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의 서두에서 사랑이 내포할 수 있는 세 가지 다른 속성들을 구분하는 작업을 한다. ‘은혜적 사랑’(gift-love)은 부모가 아무런 대가 없이 자녀들을 위해 물질을 준비해 두는 것과 같이, 요구 없는 일방적인 것이다. 반면에 ‘필요적 사랑’(need-love)은 어린 아이가 두려운 대상을 피해 엄마의 품에 안기는 것과 같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취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순전한 은혜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은 서로에게 온전히 자신을 주는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도 이와 같이 온전히 베푸는 무조건적 사랑에 근거한다. 그러나 자연적 사랑의 표현 속에도 은혜적 사랑의 흔적이 보인다. 앞서 말한 대로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절대적 희생을 치르며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자녀들을 위해 내어주는 모습에서 그런 사랑을 엿볼 수 있다. 필요적 사랑은 인간의 사랑을 대변할 만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비춰볼 때, 인간은 욕구의 거대한 바다처럼 보인다. 은혜적 사랑과 비교할 때 필요적 사랑은 사랑도 아닌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필요적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비록 수동적이고 상대에 대해 조건적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인간에게 너무나 자연스럽다. 창조주께서도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도, 긍휼도 모르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냉담한 인간일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분에 대한 필요를 깊이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깝다고 할 때 이것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의미에서 가까움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의미에서 가까움이다. 전자의 경우에 인간의 이성, 창조력, 능력, 자유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 속성의 그림자를 소유했다고 해서 그 자체가 영적 건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것이 교만과 자기 기만으로 나타나 엄청난 영적 파괴를 가져올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 영적 유익을 충분히 유발한다. 우리가 절대적인 필요를 느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경건에 이르는 길이다. 사랑에 대해 고려해 보면 비슷한 현상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접근하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의 사랑이 은혜적 사랑이 되었다고 여길 때, 우리의 사랑을 신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심각한 영적 질병에 걸리게 된다.

여기서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의 중심 사상이 될 만한 말을 외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이 하나님이 되면 그것은 곧 악마가 된다.” 우리의 사랑을 절대화하는 순간, 그것이 아무리 고상하게 보일지라도 엄청나게 파괴적인 힘으로 변해 인생을 불행으로 끌어내리고 만다. 따라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주권 앞에 끊임없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가장 이타적인 사랑도 결국 우리의 집착으로 변질되고 만다. 이 사실을 가장 잘 설명한 루이스의 판타지가 「천국과 지옥의 이혼」 및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관리하기에 은혜적 사랑이 필요적 사랑보다 더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사랑의 속성

인간이 경험하는 사랑의 속성에 은혜적 사랑, 필요적 사랑 외에 ‘감사적 사랑’(appreciative love)이 있다. 감사적 사랑은 자신이 좋아 하는 대상을 그 모습 그대로 즐거워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대상이 지닌 조건과 상관없이 사랑을 베푸는 은혜적 사랑과 차이가 있다. 동시에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상을 필요로 하는 필요적 사랑과도 다르다. 감사적 사랑은 조건적이지만 자신의 욕구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구분해 보면 어떨까? 필요적 사랑은 자신의 상태가 조건이고(self-conditioned), 감사적 사랑은 대상의 상태가 조건이며 (object-conditioned), 은혜적 사랑은 무조건적이다(unconditioned). 루이스의 말대로 하면, 욕구적 사랑은 우리의 영적 굶주림으로부터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것이고, 은혜적 사랑은 아무런 대가를 생각지 않고 그를 섬기고 그를 위해 고난 받기를 자처하는 것이며, 감사적 사랑은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로 인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루이스는 우리가 무엇이나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 세 가지 사랑의 속성은 일반적으로 뒤죽박죽 섞여 있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의 속성을 구분함으로써 발생하기 쉬운 사랑에 대한 자신의 오해를 극복하고, 사랑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우리가 누리는 아름다운 삶의 경험으로 이해하며 사용하는 것은 큰 유익이 된다. 아울러 사랑에 대해 여러 가지 예술적 표현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훌륭한 사고의 틀을 얻게 된다는 즐거움도 있다. 사랑을 평가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연적 사랑을 절대화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피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든지, 각자의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깊이 느끼든 그것이 절대화되면 우상으로 된다. 사랑의 여러 가지 색깔을 즐겨라. 그러나 그 색깔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 사랑의 색깔을 가능케 하는 빛이 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 위에 계심을 인정하라.


사랑의 네 가지 색깔을 즐겨라

둘째, 루이스는 사랑의 종류를 긍휼(스톨케)과 우정(필리아)과 애정(에로스) 그리고 자비(아가페)로 구분한다. 긍휼, 우정, 애정은 자연적 사랑이지만 그 자체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하다. 반면에 자비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랑으로 인간의 자연적 사랑을 변화시킬 수 있는 궁극적인 자원이다.

긍휼은 부모가 자녀에게, 또는 자녀가 부모에게 베푸는 사랑을 의미한다. 긍휼은 사랑의 대상에게 어떤 비본질적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측면, 즉 단순히 자녀이기에 일방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영혼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던가? 그런데 긍휼이 갖고 있는 약점이 있다. 대표적으로 이 사랑은 지극히 자연적인 것(심지어 짐승의 세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에 당연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부모는 부모이기에 자녀가 항상 자신을 필요로 하기를 당연시하고, 자녀는 자녀이기에 부모로부터 항상 돌봄을 받아야 한다고 당연시할 수 있다.

만일 부모와 자식 간에 다른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끼어든다면 엄청난 질투를 유발할 수 있다. 아들에게 집착하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라든지, 형제 자매 간에 심각한 시기와 질투로 인한 싸움이 번지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긍휼은 이성과 정의와 겸손으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빗나간 화살처럼 엉뚱한 자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위태로움을 내포한다.

우정은 지적이고 영적인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육체적 소욕이나 감정의 고저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아울러 우정은 상대를 소유적으로 집착하기보다 자유롭게 자신을 주는 성격이 있다. 그래서 진정한 우정은 자신만의 소유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참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정은 질투와 투기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 누구든지 비슷한 정서와 관심사를 나눈다면, 친구들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열린 문을 비치하고 있다. 이처럼 열려 있고 순수하며 자유로운 참여적인 우정은 하나님 사랑의 한 측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스의 성숙기는 ‘암시’(the Inklings)라는 이름을 갖는 우정을 기초로 해서 한 그룹의 교제권에 싸여 있었다. 암시의 핵심 멤버는 J. R. R. 톨킨, 찰스 윌리엄스, 휴고 다이슨 같은 문학적 인식이 높고 초월적 낭만주의를 만끽한 사람들이었다. 이 모임은 1939년에 시작해 루이스가 세상을 떠난 1963년까지 멤버에 약간의 변화만 있었을 뿐 지속되었다. 루이스는 ‘암시’뿐 아니라 유아기 때부터 5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던 아더 그리브스(Arthur Greeves), 그리고 항상 논쟁의 대상이 돼 주었던 오웬 바필드(Owen Barfield)와 끊이지 않는 우정의 줄로 묶여 있었다. 루이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가 바로 우정이다. 만일 루이스에게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의 문학, 신앙, 철학 중에 어느 하나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정에게도 함정이 있다. 공동 관심사를 기반으로 해서 선택적으로 쌓인 우정도 집단적인 배타주의를 낳을 수 있다. 자신들만이 특별하다는 우월적 감정에 휩싸일 수 있고, 무조건 서로를 흠모하며 추켜세우는 데 익숙한 외인의 눈에는 꼴불견일 수밖에 없는 이상한 집단으로 몰락할 수도 있다. 잘못하면 지적, 영적 교만을 키우고 자기 만족을 위해 배타적 성향을 고취시키는 죄의 산실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정도 그 자체로 완성되지 않는다. 친구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게 아닌, 객관적인 ‘선’(goodness)에 대한 관심과 인정이 지속돼야 한다. 그 ‘선’은 우정의 관계성에서만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정은 친구들이 어깨를 맞대고 함께 ‘선’을 추구할 줄 아는 성숙과 신앙적 미덕으로 연결돼야 한다.


인간됨의 참 의미를 구현하는 길

반면에 애정은 서로 마주 보고 상대에게 빠져들어 가는 형태의 사랑이다. 루이스가 말하는 애정은 성적 욕구를 뜻하는 게 아니다. 「네 가지 사랑」에서 루이스는 성적 욕구를 ‘비너스’(Venus)라는 용어로 구분해서 부른다. 애정은 자신의 중심에서 타오르는 상대에 대한 깊은 관심을 뜻하며, 순수한 의미에서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연인의 관계 또는 부부의 관계로 설명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애정은 선별적이다. 선별한 한 개인과 일대일로 집중되지 않으면 질투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에로스의 힘은 엄청난 폭발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쉽게 절대화나 우상화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극렬한 에로스(애정의 대상을 말하지 않고 애정 그 자체)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들이 정당화될 수 있다. 이처럼 에로스적 사랑에 빠지면 객관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애정도 신실함과 진실됨의 성품으로 충분히 보충되지 않으면 파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자연적 사랑으로서 긍휼, 우정, 애정은 그 순수한 형태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체로 두면 역시 타락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더 깊은 죄악으로 치닫게 된다. 그렇기에 인간 삶의 중심이 되는 사랑 역시 성화의 여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화를 진행시키는 힘이 될까? 한마디로 사랑의 본질인 하나님의 사랑이다. 자비 즉 아가페의 사랑은 자연적이라기보다 초자연적이다. 긍휼과 같이 사랑스럽지 않은 대상이라도 사랑할 수 있다. 우정과 같이 열려 있고 자유하다. 아울러 애정과 같이 상대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비워 내준다.

그러나 죄악된 망가짐이 그 안에 없고 순수하며 온전하다. 자연적 사랑의 좋은 특성을 망라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타락성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사실 자연적 사랑의 좋은 특성은 초자연적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단지 자연적 사랑은 타락이라는 비극적 인간 현실로 인해 망가지고 빗나갈 수 있는 나약한 속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아가페는 순전한 것일 뿐 아니라, 망가진 자연적 사랑마저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 아가페로 변화된 긍휼과 우정과 애정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참된 행복, 즉 인간됨의 참 의미를 구현하는 길이 된다.


아가페로 가는 길

그런데 자연적 사랑이 초자연적 사랑으로 인해 변화될 수 있다는 말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루이스가 말하는 자연과 초자연의 관계를 아퀴나스(Thomas Aquinas)적 자연과 은혜, 즉 자연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그 위에 보너스처럼 더해지는 은혜의 개념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루이스는 자연의 증거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의 주장에 대해 기본적으로 열려 있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즉 긍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는 자연의 증거를 일반 은총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그 자체가 구속적 은혜를 전달하는 특별 은총의 수발자가 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만일 온전한 신학을 배우고 싶다면 웅장한 자연을 등지고 초라하고 촌스러워 보이는 예배당이라 할지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 전파되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그는 확고하게 말한다. 이런 면에서 루이스를 전통적 자연 신학자(Natural Theo-logian)라고 할 수 없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자연적 사랑과 초자연적 사랑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루이스는 자연적 사랑 위에 아가페적 사랑을 살짝 씌움으로써 은혜의 역할을 다 했다고 하지 않는다. 자연적 사랑이 아가페적 사랑으로 인해 변화되는 작업은 심령적이고 내면적이다. 따라서 성화의 과정, 즉 변화를 위한 심각한 싸움을 동반하게 된다. 아가페로 가는 길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결국 죽음을 통해 새 생명으로 가는 것이다.

자연적 사랑 속에 아가페가 성육신하는 과정은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자리까지, 십자가의 죽음까지 나아가신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것처럼 자신을 부인하는 길이다. 그러나 여전히 긍휼은 긍휼로, 우정은 우정으로, 애정은 애정으로 존재하며 동시에 아가페 사랑의 성육신을 수반하는 그릇으로 부모와 자녀 사이, 친구와 친구 사이, 연인과 연인 사이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참 사랑의 형태가 기독교 윤리의 총체적 목적(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의 순례에서 만난 십자가

루이스의 구원론은 칭의에 초점을 두기보다 성화에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칭의적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대한 이해는 풍부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주권적 중생을 체험하는 것은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첫 단계이며,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을 향해 길고 긴 여정을 떠나는 첫 걸음일 뿐이다. 이것을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선 안 된다. 회심 후에 일어나야 하는 변화의 삶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루이스가 기독교 윤리나 성도의 덕망에 대한 깊은 고민과 이해를 가지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 루이스에 대해 순례자를 위한 영적 인도자(spiritual director)로 묘사한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루이스의 영성은 신비주의도, 반율법주의도 아닌 성화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신학을 기초로 한다. 동시에 신율법주의에 치우치지 않는 이유는 성화의 과정도 초자연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진행되는 것이 틀림없음을 인정하는 겸손이 그의 생각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생각하길 좋아하는 기독인으로서 그의 장점은 전후좌우를 살필 줄 아는 지성적이고 신앙적인 통전성(integrity)에 있다. 「네 가지 사랑」에서 성숙하게 보여주는 것도 이와 같은 균형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 이것을 누군가는 성공회적 신앙의 주요 가치인 ‘중도’(via media) 지향적 사고의 반영이라고 했다.
하지만 루이스의 사고적 균형은 단순히 중도 자체를 유지하려는 자세이기보다 참 학자다운 지적 책임감이며, 어릴 적부터 자신을 지배해 온 진리에 대한 열정에 근원을 두고 있다. 물론 그의 결론이 항상 옳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가 차지한 자리에서 정직과 성실로 노력한 결과라는 사실만은 인정하고 싶다.

문학가, 학자, 신앙인 그리고 인생의 순례자로서 60평생을 돌아보는 성숙한 자리에서 인간의 최대 관심사인 사랑을 논할 수 있었던 용기도 성화의 아픔을 통과하고 있는 삶의 증거자로 고난 가운데 서 있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어느덧 사랑을 해부하고 설명하면서 초월자로부터 비춰지는 서광 때문에 아름답지만은 않은 세상이 온갖 예쁜 색으로 물들어 있음을 증거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 안에 서 있는 자신의 초라함마저 그 서광 아래서 광채를 발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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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지 사랑" 이 책에는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보통 내가 읽는 책이나 음악엔 적어도 한가지 씩의
추억이 깃드는데 이 책에는 좀 아픈 추억이 있죠.
와이프의 양성의 이물질을 제거하는 수술
기다리는동안 이 책을 또 보고 있었는데... 예전에
밑줄친 부분으로 고속으로 읽고 있었는데,
사랑편쯤에서 의사가 나와서 양성이 아니라 암
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목사님께 전화하며 .. 다른 손에 잡고 있던
책이 바로 이 책이죠.
잊을 수 없는 아픈 추억이 서린 이 책... 저와의
인연은 참으로 오래되었습니다. 한 10년전 저와
처음 만나 질긴 인연을 유지하는 고마운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