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 하덕규 vs 조성모 (동영상 올렸습니다)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06-11-12 09:12:46    조회: 5,518회    댓글: 0
tv에서 조성모가 부른 '가시나무'가 나오면서 영화가 배경에 나오는걸 보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을 좋아하는 시대 만나 들려줄걸 보여주어 더 큰 성공을 이루었구나..' 문득 무슨 영화인지 궁금해 구글에 쳤더니 나온 글입니다.

흥미도 있고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거 같아 퍼 왔습니다.


'가시나무'의 비극- 참을수 없는 가벼움 UPDATE : 2000.04.03
* 이 글은 millizine.com의 column란에 실린 글입니다.

이소영


조성모의 "가시나무"가 한참 뜨고 있다. 많은 대중가요들이 리메이크되어 원곡보다 히트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가시나무의 경우는 리메이크 히트란 말로 단순히 접어두기에는 간단치 않는 생각거리들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가시나무는 본디 동아기획에서 나온 "시인과 촌장 숲"이란 음반에 나오는 하덕규작사, 작곡의 노래이다. 80년대 중반 `TV스타'와 `오빠부대'로 상징되는 오버그라운드와 대비되어 `라이브'와 `음반', `매니어'로 상징되는 언더그라운드가 대두하여 천편일률적인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지형변화를 이루어 나갈 때 이 언더그라운드의 산실은 `동아기획'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동아기획의 제작 및 기획력과 맞물려 TV란 강력한 대중매체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음악성과 작가성으로 승부하려는 소위 `아티스트'들이 언더그라운드 사단을 만들게 되는데 이때 대중음악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음악가들이란 다름아닌, 김현식, 봄 여름가을 겨울,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부활이나 백두산같은 헤비메틀의 그룹, 이정선과 엄인호 등의 블루스 계열의 음악가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덕규의 `가시나무'는 상투적이고 번지르르하기만 한 상업적 음악에 대한 새로운 대안의 한 예였던 셈이다. 가시나무의 가사를 한번만 음미해보면서 노래를 들어봐도 이 노래가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의 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속엔 내가 어쩔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 뺏고
내속엔 내가 이길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한번 하덕규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니 이런 저런 떠오르는 상념들로 글 쓰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다. 가장 객관적인 마음을 가지고 `비평'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과는 상관없이 이 음악은 나를 한없이 주관적으로 반응시키면서 내 자신의 깊숙한 곳으로 침잠시키기 때문이다.
내 속에 자리잡은 수많은 이기적인 나, 그 헛된 욕망으로 다른 사람이 비집고 들어올 공간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나도 `어쩔수 없는', 내 스스로 `이기지 못하는' 어둠이고 슬픔이라는 것... 나아가 작가는 그런 초라한 자신을 가시나무에 비유한다. `무성한 가시'와 `메마른 가지'.... 무성하기는 한데 그 무성함은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아프게 찔리는 가시의 무성함이었고 어린새도 쉴 수 없는, 잎하나 없이 앙상하기만 한 나뭇가지의 메마름... 그래서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 부르며 울어대는 날이 많았구나....

이렇듯 자아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을 담고 있는 노래가 대중음악의 주류에서 가장 잘나가고 있는 조성모의 발라드로 리메이크 되었다는 것은 퍽 아이러니이다. 그렇다면 조성모의 가시나무는 어떤가? 조성모의 가시나무는 하덕규의 그것에 비하면 많은 음악적 덧칠이 이루어진 버전이다.
도입부에 <태양의 제국> OST에 나오는 체코의 성악곡이 삽입되면서 우리의 시선은 `지금 여기의 나'가 아닌 머나먼 이국으로 잠시 향하게 되고 약간의 바람소리와 피아노타건이 원곡의 자취도 느껴지게 하지만 두껍게 흐르는 오케스트라의 유려함이 곡 전체의 부피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그 자취는 곧 희미해지고, 나아가 그 확장이 너무 지배적이어서 노래 선율이 그 위에 살포시 얹혀지는 배경적 역할에 머무르게 된다. 오케스트라 반주가 주인이고 노래 선율은 손님이 되는 주객전도.
그런 상황에서 가사의 내용과 의미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조성모의 발라드 가창방법(약간의 바이브레이션과 가사발음 흐리기)은 가사에 대한 중요성을 희석시키는데 일조할 뿐만 아니라 정조 자체를 일종의 `멜로물'로 변화시키고 있다.
더구나 이 곡의 뮤직비디오를 한두번이라도 보게되면 하덕규 가시나무가 가졌던 원래의 진정성은 완벽히 거세되고 보다 확실한 `멜로 드라마'의 주제가로 변신하는데 성공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차피 많이 파는게 목적인데 골치아프게 자아성찰 이런게 어딨어.. 그러니까 하덕규 너는 죽었다깨나도 백만장 파는 톱스타가 될 수 없는거야,-조성모가 하덕규에게) MTV등장 이후 뮤직비디오는 음악을 시각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조성의 뮤직 비디오는 그간의 뮤직비디오와도 확실히 차별성이 있다. 그간의 뮤직비디오들을 보면 가수들이 나오고 그 가수의 노래와 그 노래와 관련된 가사의 줄거리를 부분적으로 연상시키는 상황이 파편적으로 서로 조합되고 혹은 가수들이 여러 씬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이 분절적으로 이어지면서 음악과 영상이 단지 이미지적으로 결합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조성모의 뮤직비디오는 그 자체로 완벽한 내러티브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대사없는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이영애와 김석훈, 구본승, 손지창등의 호화캐스트들이 주연배우로 등장하고 있고 일본영화 `러브레터'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눈오는 거리, 그 러브레터 주인공만큼이나 청순한 이미지의 이영애와 김석훈... (그런데 어째 이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여기서 마치 일본배우나 홍콩배우 같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일까?) 술집종업원 이영애와 우편배달부 김석훈과의 풋풋한 사랑이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등장한 조직폭력배들에 의해 끌려가 잘생긴 미남 두목 손지창앞에서 눈물을 똑똑 흘리는 이영애. .(그의 기모노는 확실히 무대설정이 일본임을 드러내준다).
여하튼 처음엔 무심히 보다가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아름다운 화면에, 그 화면이 엮어내는 이야기 구조에 푹 빠져들어 어떻게 결말이 날 것인가 손에 땀을 쥐게하면서 보게하는 삼각관계 멜로물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조성모의 `가시나무'는? 내가 언제 가시나무를 들었던가? 내가 들은 건 드라마틱한 멜로 영화의 배경음악일 뿐인데.. 긴박하게 움직이는 화면과 그 화면뒤로 멀리 물러서서 축소된, 그리고 희미해진 조성모의 `구음'(전혀 가사가 안들리는 관계로 노래라는 말로는 적합치 않다)과 역시 감성적으로 흐르는 유장한 오케스트라의 음향... 여기서 주인은 영상이고 음악과 조성모는 그에 종(從)하게 된다. 두 번째 주객전도.
그러고 보면 조성모의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통해 이루어진 두번의 주객전도는 하덕규의 `가시나무'가 가졌던 원래의 의미와 정조(일명 Aura)를 깨끗이 탈색시키고 확실히 상업적이고 통속화된 발라드 노래로 탈바꿈하는데 결정적 요소였다. 하지만 어쩌랴. 골치아프게 부끄러운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보다는 두 잘생긴 남자배우사이에서 고민하는 어여뿐 이영애와의 동일시가 더 즐거운 일임에야... 어차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미덕이 되는 시대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성모의 가시나무를 듣고 있노라면 한때 마음의 무게를 실어 들었던 하덕규의 노래가 `강간'당하는 것에 자꾸 울분이 치켜 올라오는 것은 무엇일까. 상업적인 것과 거리가 먼 것들에까지 여지없이 손을 뻗쳐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자본의 위력에 대한 씁쓸함일까. 아니면 하덕규 노래의 원 의미도 알지 못한 채 결국 자신들의 정신을 흐리멍텅하게 마비시키는지도 모르고 오늘도 설경아래 펼쳐지는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떠올리기 위해 조성모의 가시나무를 열심히 듣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에 대한 답답함? 어쩌면 노래의 강간보다 더 경계해야하는 건 그 속에서 멍청하게 길들여지는 우리의 정신일지도 몰라.
"내속엔 (되고 싶은)이영애가 너무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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