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죽을 각오하고... [6]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04-03-21 19:57:08    조회: 2,851회    댓글: 6
언젠가 책의 제목 중에 이런 것을 보았습니다.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쓴 한국인의 의식구조’.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랬습니다. 그 제목에 용기를 얻어 저도 오늘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익명(?)으로 글을 좀 써볼까 합니다.

가끔 어떤 설교를 들으면  정말 무슨 말인지, 듣고 있는 순간에도 하나도 모르겠고 또 정리가 되지 않고, 듣고 나서는 더더욱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혹 내가 졸았나 옆사람에게 집요하게 물어보면 그 대답은 똑같습니다.  하나 하나가 어디서 많이도 들어본 말인데 맨 뒤에서는 도무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를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때면 좀 장난기의 발동으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이 말을 하고 있는 저 사람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이 알고 있을까?,”  “저 들고 있는 원고를 뺏아 버리면 하려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갈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말을 많이 하는 저로서는 경험상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스스로 정확히 알지 못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절대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압니다.  내가 스스로 이해를 했다 하더래도 대중을 이해 시키기 위해선 많은 시간을 들여서 조리있게 글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아성찰을 위한 말과 글이면 무슨 상관이 있겠냐마는 대중을 위한 글과 말이면 내용만큼 전달방법도 무시 할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 뿐입니다. 한시간 열심히 설교를 듣고나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뭔가를 잡을 수가 없을때 오는 공허함도 참 견디기 힘듭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교역자분들께서는 아주 불쾌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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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말씀을 쓰셨다고 맞아 죽으신다면 우리교회가 아니겠지요. 만일 지난 주일 제 설교가 조금, 아니 많은 경우 저의 설교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으신다는 고민이시라면 (1) 좀 더 잘 정돈되지 못한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사과드립니다. (2) 말씀을 잘 경청 하면서 무엇인가를 건지려고 집중하신다는 말씀은 참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공허감을 느끼신다는 구절도 참 귀하게 들립니다. (3) 다른 교역자님들을 모르겠습니다 만 저로써는 제가 하려고 하는 설교의 요지를 먼저 마음에 정돈해 보려고 노력은 합니다. 원고와 상관없이 한 두마디로 설교가 정돈된다면 어느정도 자신감을 갖고 설교에 임하게 되지요. 사실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안타깝지만요. 좀더 전달의 효율성을 개발하기 위하여 노력하겠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이들은 아마도 최선을 다할것 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하나님의말씀을 전하는 책임을 분명히 알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말입니다,저는 음식을 만들줄 아주 모르면서도 아내의 음식맛을 평가할수는 있느때가 있습니다.설교를 들을때 예배시간전에 먼저 본문 말씀을 읽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말씀을 들을때 나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주의해서 집중할려고 하곤합니다. 아내가들었으면 좋았을텐데가 ,또 그누구가 들었으면 하는것이 아니라 나자신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기대하곤 합니다. 그러면 설사 말씀 전하는 분이 죽을 쑨다고 해도 저를향한 적용을 건지곤 합니다. 반대로 내마음의 상태가 준비되지 못한때는 가령 교회오기전에 아내와 다투기라도 했다면 그날은 아무리 명설교도 제귀에는 말귀에 스쳐가는 동쪽의 바람 같은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한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40시간을 쓰셨다고 제물음에 대답해 주셨던것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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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올리신 분의 표현과 달리,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는 자신의 진지한 의견을 나눈 것에 대해서 "때릴" 사람도 없고, 자신의 심사숙고에 근거한 비판때문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님(dentsmith라고 자신을 밝히신)의 견해에 설교자의 한사람으로서 죄송함을 느낍니다. 논리적으로 잘 연결되는 설교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왔다갔다 한다면, 얼마나 혼동스럽겠습니까? 그런 부분에서 더욱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민집사님이 말씀하셨듯이, 설교자의 설교가 오랜 묵상과 기도와 영혼사랑이 어우러져 성령님께서 기름을 부어주시는 가운데 선포한 것이라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은혜라는 것으로서 정확한 논리의 필요성을 배제하자는 의미는 아닌줄 아실 것입니다.
비슷한 의미이지만, 설교에는 성령님의 역사하심, 설교자의 진지한 기도와 말씀준비, 그리고 예배에 참여한 분들의 기도와 사모함으로 준비된 마음이 함께 할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에 주관적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님"의 마음이 기도와 사모함으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돌려서 말함이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하기 어려운 말씀하셔서, 설교자들로 하여금 고민과 각성을 하게 하심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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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를 하시는 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이 이해 할 수 있도록 전해야 할 절대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그 설교에 은혜 받아야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사십분동안 들은 모든 내용을 다 우리가 기억하고 적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듣다 보면 어느 한 단어, 한 문장이 가슴을 치는 것을 경험합니다. 미리 판단해서 마음을 닫고 다 놓치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듣고 꼭 건져야 한다고 생각으로 듣다 보면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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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 댓글 다신 분들은 마치 듣는자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요. 요즘 목사님 설교를 듣다보면... 솔직히 황설수설 할 때가 많습니다. 듣는 자에게 책임이 있는 경우는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마음속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바리생인들처럼... 그들은 예수님이 무슨 뜻으로 말씀하셨는지는 알았으나, 회개하지 않고 반발했죠. 하지만 요즘 설교는 무슨 말씀을 하려는지 제대로 전달이 안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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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의 해결책에만 흥분해 있습니다.  문제의 프레임을 볼 식견은 없나봅니다.  안타깝네요. 정작 대답을 듣고 싶은 분은 결코 댓글을 달지 않네요.  하지만 이글에서 지적하는 충고가 먹혔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이런 글이 나올수 있는 여유는 이미 성숙을 갖추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같아 좋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