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 (그리스도의 수난) [4]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04-03-05 19:50:39    조회: 2,816회    댓글: 4
영화를 보자마자 급하게 쓴 글이라 많이 엉성합니다.  실수한 부분이 있기도하고 하지만 급하게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서 그냥 올립니다.  혹시 의문점이 있으시거나 꼭 얘기되어야 할 부분이 따로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분들은 연락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kyongr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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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는 복음서를 제외하고 역사적으로 미술과 음악에서 늘 표현되어져왔다.  특별히 영화라는 메개체는 서술구조의 성격을 발휘하여 예수의 전 생애를 표현해 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예수님의 수난만을 집중하여 보여주는 영화이라는 것에서 지금까지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룬 영화와는 분리되어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역사적인 시점이나 시간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의 수난만을 그리려 노력했다면 단순한 사실을 다루기 보다는 의미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멜깁슨의 작가주의

'그리스도의 수난' 이라는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적으로 그의 작가적 성향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멜깁슨은 로드무비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로드무비란 사실성과 시대성을 반영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탈시대, 또는 탈역사성을 통해 인류에 깊숙히 존재하여 있는 진리와 본질(또는 본능)이라는 것을 표출하려는 하나의 영화쟝르이다.  아마 1980년대 초중반의 그의 영화를 보면 이러한 쟝르를 통해 자신의 배우적 성향을 굳혀 온 것을 볼 수 있다.

또 하나 그의 영화를 통해 고려되지는 것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사실성이라는 이슈에 대한 그의 이해이다.  그의 로드무비적 성향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사실 또는 실제적이라는 것은 본질이나 진리와 상당히 연관성이 있다.  다시말하면 아무리 그것이 역사적으로 동의되는 사실이더라도 그것의 실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의 사실성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상당히 실존주의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그의 최근 작품이라 할 수 있는 Patriot에서는 역사를 그가 실존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면서, Brave Heart를 통해서는 탈시대성을 통해 그가 보이려는 본질과 진리에 대한 관심이 깊숙이 배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그의 작가적 성향이 그의 신앙(케톨릭)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왜 하필이면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다루기 보다는 수난 부분만을 다루는가를 설명하는데 깊은 관계가 있다.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

이 영화에서 그의 장끼인 탈역사성은 실패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고 그 실화에 대한 관객들의 선지식에서 영화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탈역사성적 성향을 포기하면서 이 영화에 도전하였다.

이 영화는 복음서에 대한 대강의 시간적 흐름과 사건에 대한 이해가 있는 관객에게 적당한 영화이다.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피땀을 흘리시는 기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난 당하시는 중 중간 중간 나오는 회상 장면은 관객이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다라는 전재하에 보여지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시작하여 영화는 재판과정과 매맞으시는 과정 그리고 십자가 처형 마지막으로 부활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 영화에 있어서 부활이라는 것 보다는 수난자체에 의미를 실어 놓고 있다.  바로 카톨릭적 신학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는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예수의 대속의 처절함이 그렇게 부각되어지지 않는다.  반면 카톨릭은 예수님의 처절한 고난에 초점을 두고 있는 점에서 신자의 신자로서의 태도에서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

 

개신교는 대속으로 이루어진 구원에 대한 감격과 사단의 등뼈를 분지러 버린 이 사건에 대한 축제적인 성향이 강하다.  바로 성경이 중점을 두고 있는 메세지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톨릭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애도함을 통해 신자를 정의내리는 성향이 강하다.  아마 이 애도함이 신앙심에 관계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애도함에 있어서는 대표적인 인물이 될 것이다.  그녀가 당한 슬픔과 한...  그것이 신앙심에 있어서 본보기로 삼는 것은 카톨릭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그녀의 슬픔과 한을 개신교에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척도로 여겨지는 것은 대속하심의 더 큰 의미에서는 좀 벗어난 듯하다.  이것이 극단으로 가다보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포함한 4위일체설이 대두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예수님을 통한 주권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중요성이 상실되어 있으며 인간인 마리아의 슬픔과 한이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부여한다면 구원의 맥락에서 믿음보다는 종교적 업적이 상당히 부각되어진다는 결론을 피할 수는 없다.  신자가 되는 것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지는 선물이 아닐까...

 

그와 인터뷰를 가진 존스톤이라는 기독교계 영화 및 문화 평론가는 멜깁슨이 18세기 한 성자의 기도문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어 표현했다고 그가 고백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신자의 종교적 감성이라는 면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지, 꼭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일어난 구원의 신성함과 그 축복을 표현하고 있는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영화의 폭력성(violence)를 예로 들 수 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장면보다 그가 매맞는 장면이 더 끔찍하게 강조되어 있다.  온 전신의 살점이 뚝뚝 파여지는 장면은 보는 이로하여금 감당하기 어렵게한다.  이러한 선정성은 상당히 심리적인 것과 관계하고 있다.  이 영화가 다른 영화들 보더 더 폭력적으로 선정적이다 말할 수는 없음에도 그것이 보는 이로하여금 힘이 들게하는 것은 심리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약 12년전 조디 포스터의 '피고인(the accused)' 라는 영화에서 한 여인이 강간당하는 장면을 10분이상 보여주었다.  이것을 놓고 성적 선정성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폭력적 선정성으로 보아야 할지 당시 심의 위원들은 고민하였다.  아이러니 한 것은 성적 선정성으로 보았다는 결과이다 (한국에서).  그러나 이 영화의 선정성은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폭력성이다.  무고한 여인이 남성들의 성욕에 희생되어지는 그 장면은 분명한 폭력이었다.  이러한 폭력은 당연히 인간모두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오랫동안 머리에 남게된다.

 

그렇다면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은 단 10분이 아닌 2시간 10분이라는 시간동안 계속되어지는 무고한 한 청년의 죽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분명이 영화는 유대인들의 잔인성에 대한 폭로는 아니다.  그렇게 보는 유대인 학자들이 반유대적인 성향으로 영화가 제작되었다고 정죄하지만 사실 다른 예수님에 관련된 영화는 반유대적 성향이 이 영화보다 그 배경설명에서 더 강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이러한 폭력적 선정성은 폭로나 고발보다는 종교적 감성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폭력성은 동시에 일반적으로 인간의 무자비한 죄성을 그대로 표출하여 관객들(신자 불신자 모두)에게 인간성에 대한 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인간 모두는 죄인이라는 일반적 진리를 강하게 설득하고 있음에 사실이다. 

결국 이 영화는 신자들에게는 종교적 감성의 자극을 주는 이 점은 있지만 복음적으로 불신자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폭력성으로 보여지는 인간 모두는 죄인이라는 설득은 다른 많은 영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점에서 아쉽다.  어떤 면에서는 신학적으로 카톨릭의 복음적이지 못한 한계성을 드러내는 영화인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멜깁슨의 작자적 성향과 그의 영화적 리얼리티 이슈에 대한 이해는 그의 카톨릭 신앙과 예수의 수난에 대한 이해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본다. 

성경은 복음 선포되어진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이 부정하던 하지 않던 더 큰 권위에서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감성적 자극으로 신앙의 정도를 측정하거나 눈에 보이는 종교적 업적으로 나의 구원을 확신하려는 자기 노력은 복음의 선포성에 비추어 볼 때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우너하심에 감사의 제사적 행위는 부정되어서는 않된다.

실존적 이해로 받아드려지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복음은 이루어진 사건으로서 있는 그대로에 복종하고 받아드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선물이 아닌 구원은 참 구원이 아니다.  그것은 댓가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어떻게 보고 이해할 것인가?

1.
그렇다면 이 영화는 보지 말라는 말인가?  절대 아니다.  영화적으로 참 세련된 영화이며 지금까지 나온 어떤 종교영화보다, 아니 일반적으로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중에서도 으뜸이라 자부할 수 있는 영화이다.

 

종교적으로 헐리우드의 반항아라는 딱지를 감수(헐리우드는 유대인들의 상업 터전이다)하고 만들었다는데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  또한 이것의 흥행정도는 작가주의적 성향의 독립영화 (재정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그 작가적 성향에서 이다.  멜깁슨은 스스로 감독에서 스크립트를 비롯한 영화의 전반적인 부분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pre & post production 시스템 자체는 헐리우드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멜깁슨이 헐리우드 대 스타로서의 제작에 있어서는 잇점이면서도 영화의 정체성에서는 부조리적이다) 로서 그 의미가 크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적 제한을 통해서 이루어진 플롯은 상당히 전통적인 연출로 그 제한성을 극복하고 있다.  바로 회상장면들이 그 제한성을 극복해 주고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매를 맞으시다가 자신을 내려치는 병사의 발을 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을 회상하시는 것은 세련되면서도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플롯의 기술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신교 신자들은 복음에 대한 확신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수난은 그리고 그 적날함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예수님이 얼마나 순결하신 분이신가를 그의 무고한 죽음을 통해 묵상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유대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자신들이 무지한 무자비함에 옷을 찢으며 회개한 것과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우리의 죄로 옷이 아닌 가슴을 찢는 죄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영광스러운 대속하심의 질적인 면이 한 청년의 불쌍하고 무고한 죽음으로 이해되어져서는 않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활로 그 분의 죽음이 완전한 대속이었다는 신앙의 고백과 함께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수난을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더러운 우리의 죄보다 더 큰 은혜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애도함이 부각 되어진다면 신앙의 본질이 상실되는 경우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외치는 신자들이며 이러한 승리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선포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2.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잔인한 장면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그 수난의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회상장면에서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을 느껴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며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커다란 효과를 볼 것이다.

 

3.
개인적으로 다시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  왜냐하면 너무 사적으로 깊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통해서 왜 복음서의 기자들이 예수님의 수난장면을 자세하게 그리지 않았는지 알았다. 

 

첫째로는 자세히 기술함을 인하여 고초당하심이 부각되어 대속하심의 의미가 상실되게 받아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둘째로는 예수님의 고초의 정도를 알리는 것은 순간적으로 어떤 효과는 있겠지만 그 고초의 정도가 이미 시각적으로나 다른 감각적으로 우리에게 경험되어진다면 그 고초의 정도를 다음 번에 받아드릴 때는 약화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 영화에서 처음 예수님이 매를 맞으시는 장면에서 눈을 못뜰정도로 괴로웠으면서도 나중에 십자가 처형장면에서는 오히려 눈을 뜨고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경험되어지는 어떤 것에 만성적으로 대처하는 인간의 죄성이 예수님의 고초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즉 한 번 죄를 지을 때는 두려워도 같은 죄를 두 번째할 때는 감각을 잃어버리는 우리의 무지한 자아때문에 예수님의 고초를 오히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반복되는 죄의 정도에서 상대적으로 발견되어야 하는 목적에서 복음서 기자들이 자세한(graphic) 설명을 절제하였을 것 같다는 짐작을 해 보았다. 

 

그리고 더 감사하게는 성찬을 통한 그 분의 죽으심과 대속하심의 상징적 되세김을 허락하신 그 분의 지혜에 감탄한다.

 

 

개인적인 감상과 결론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 나셔서 무덤을 나가시는 장면으로 끝을 낸다.  그 때 보여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못자국이다.

그러나 복음은 시각적이기 보다는 청각적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언약은 눈에 보이는 또는 손가락을 넣을 수 있는 예수님의 못자국을 만지는 것에서 그것이 확신되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을 버리기까지 날 사랑한 그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의 본질과 영원성이 살아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증거로 우리에게 믿음과 충성과 사랑을 강요하시지 않는다.  그 분은 자신의 선하신 인격을 온 세상을 통해 깨닫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과 내 자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이미 알 수 있었다.

 

계절이 지나가고 꽃이 피고 지고, 아이들의 맑은 웃음, 고난 받는 자들의 아픔과 그러나 그들에게 부어지는 자그마한 이웃이 손길을 통한 위로, 비가 온 뒤에 더 맑아지는 하늘, 태어나는 새생명들, 아름다운 목소리로 볼려지는 노래들, 때로는 거친 목소리로 불려지는 노래들 속의 아픔...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첨지 못하시는 구원의 손길과 그 분의 아름다운 창조의 손길을 알게 된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날 위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절대적으로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 분의 겸손하심과 다시 살아나신 인자(the son of man)에 대한 소식을 통해 그 위대한 창조주가 바로 나와 상관하신다는 그리고 나의 생명과 호흡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나의 경험을 초월하여 얻어지는 감격을 가지게 된다.

믿음의 눈으로 그 분의 영원함을 보길 원한다.  그 영원함은 또한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너무나 공평한 권세이다.  힘으로도, 부유함으로도, 가난함으로도, 지식으로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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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사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 영화는 그냥 영화 감상으로 넘어 갈 수 없는 영화이기에 영화의 배경과 여러 각도에서 본 설명과 비평이 꼭 필요하다는 점에서 전도사님의 글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본 저희 청소년들과 대화를 하려고 했는데 전도사님의 글 내용들이 대화의 초점을 가르쳐주고 있어서 참 유용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좀 더 여러 각도에서의 평가를 위해서 부족하지만 (특히 영화 전문가 앞에서 주름 잡는것도 아니고) 제가 느낀 점을 조금 더 하고자 합니다.  지금 읽고 바로 쓰는 글이라 혹시 전도산님의 의견과 반대는것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세요.

그냥 감성만 자극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의 초점을 둔 시각에서 보아야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적 시각이 부족한 이 영화를 보면서 꼭 명심해야 할 사항임이 분명합니다. 이 영화가 복음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감이지만 이 영화는 이 세대에 복음을 전하는데 유용히 쓰일거라고 생각합니다.

1. 한국에서 개신교가 주춤하고 캐톨릭이 증가하기 시작한지 오래된 이 때에 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했던 예수님의 고난은 인간 모두가 한번 보고 느껴야 할 점입니다. 인간이 죄와 폭행에 익숙해 지듯이 복음에도 익숙해져 그저 구원받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데 익숙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한번 주님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저 주신 구원의 선물이 그저 줄 만한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영어 복음송의 가사와 같이 예수님께서 치루신 그 대가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추상적인 십자가의 고난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바라보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값지게 볼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작가의 의도가 좋은지 나쁜지는 제가 판단할 수 없지만 "Worship Leader" 메가진 인터뷰에서, 좀 더 Real하게 표현하고 싶었지만 너무 심하게 할 수 없어서 많은 부분을 suggestive (폭행을 암시만하고 상상에 맡기는)하게 처리했다고 한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을 우리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는 그대로 표현되었고 우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면에서 유익하다고 봅니다. 어떤면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에 단순히 십자가의 고통만 생각하는 우리의 습관을 지적해 주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사야 53장은 십자가는 말하지 않지만 채찍의 고난으로 우리의 질고를 지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이 시대에 상품화되고 은혜의 값어치를 망각하게하고 추상적이 되어버린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하는 유익이 믿는자들에게는 있습니다.

2. 특히 멀티미디아 시대에 사는 이 세대에게 큰 역활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면에서는 매우 seeker-friendly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직접적으로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지만 믿지 않는 분들에게 관심을 가지게하고 예수님과 그의 고난에 대해 질문하며 더 알고 싶도록 자극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에 익숙치 못한 사람들에게 영화 중간의 회상하는 장면들을 통해 복음을 암시하고 궁금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문제시 되어온 유대인에 대한 적대심도 오히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영화안에 있을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또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 자체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그들에겐 받아들여지겠지만, 이사야서 53장 말씀의 구절을 맨 처음 넣었다는것과 영화에 사용된 언어도 그들이 대부분을 번역없이도 알아들을 수 있게 했다는 면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영화속에 복음을 증거하였다면 시간적으로도 더 길거나 고난을 표현하고자 한 본 의도에서도 벗어나야 했겠지만 그뿐만 아니라 종교성 영화가 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금만큼 관심을 가지고 보지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전도성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3.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인간적인 영화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들이 느끼는 감정조차도 인간적인 수준에서 멈추게 했지만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우리의 한명으로서 우리를 대속하였음을 나타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예수님을 인간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겐.... 사탄의 등장으로 예수님과 대비시켰고 뱀의 머리를 발으며 창세기 3장의 예언의 성취를 암시했으며 성전의 커텐을 가르고 사탄의 패배와 부활로 마무리 지으며 인간의 한계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 주님을 표현했다는 면에서 이 세상이 우리 눈에 보이는것들로 한정된것이 아니라 더 다른 존재와 세계를 암시했다는 점에서도 이 세대에를 전도하는데 도움이 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믿지 않는 분들께는 이해하기 힘든 영화임은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더욱 복음으로 무장하며 주님과 더욱 가까이하며 우리들에게 질문하는 이들에게 언제든 복음전할 준비해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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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전도사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미리 혼자 가서 볼 수도 없고, 유니는 보고 싶다고 가자고 하는데 내용도 모르고 데려갈 수 없어서 고민되었는데 자세하게 설명 해 주어서 정말 판단이 서게 되었습니다. 지난 번에 들은 강의가 전도사님의 지루한(?) 글을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읽을 수 있게 조그만 기초 지식이 되어 준 것도 감사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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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분별을 구하시는 손집사님의 열정... 끝가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니에게 좋은 경험이 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