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2일 설교노트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20-03-23 07:59:41    조회: 703회    댓글: 0
2020  03 22 (한어 주일예배)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마가복음 7장 14-30절            박성일 목사

지난 한 주간도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해 주심을 믿고 감사합니다. 건강에 대한 위협과 졍제적인 위협이 함께 오는 곤란한 시간입니다. 이 때에 가치관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게 하고, 혼자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에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사모하고, 어떤 생각을 즐겨 하는지’ 밝혀지는 시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주부터 학교와 공공기관이 문을 닫고 직장까지도 닫게 되었고, 교회도 소수만 이 자리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대부분의 성도들은 집에서 예배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확진이 되고, 죽기도 합니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앞으로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도 합니다. 힘들어도 각자가 자신을 지키고 지혜롭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정 공동체, 교회 공동체, 언약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마가복음 7장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하는데 이 시대에도 중요한 의미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상황으로 본문을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7장 1절부터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저들이 시비를 걸어 왔다.’고 합니다.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대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따르는 것을 들었고, 그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두 부류가 왔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을 통달한 율법학자들입니다. 토라를 읽고, 쓰고, 보전하는 신학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율법의 생활화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세분적으로 적용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지킴으로서 율법을 지키게 된다고 보고 율법이 모든 삶을 터치하는 것으로 율법을 지키며 살았고, 모든 유대인들이 다 지키기를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전개되는 스토리를 보면 이들의 문제를 알게 되지만 율법의 정신이 말하지 않는 세분적인 것으로 사람들이 쓸데없이 만들고, 율법정신이 정반대가 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정결예식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이것은 위생보다는 하나님 앞에 종교적인 문제로 본 것입니다. 청결이 아니라 정결예식에 관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정결예식은 특별한 상황에서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정결예식을 행함으로 부정을 씻는 것인데 바리새파들은 이것을 훨씬 더 보편화시켜서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매일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옳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장로의 전통’이라고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정결예식이 보편화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로 씻는 것이 청결과 무관하지 않지만 예식이라는 측면에서 물로 뿌리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일전에 명동성당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입구에 물을 담는 대야가 있고, 그 대야에는 물이 없는데 한 신부가 대야의 물로 손을 씻는 시늉으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29:13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여전히 유대인들의 종교 행위가 성전에 남아 있었어도 이사야를 통해서 위선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달라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데 마음에는 멀리 떨어져있다고 합니다.
둘,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가 일어어나지 않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드십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온전히 율법을 지켜주셨고, 그것이 어떻게  확실하게 우리에게 전가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화의 삶을 보여주는 측면이 복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율법은 “내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전심으로 해야 하는데 물질로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고르반’이라고 했습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려진 성물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물질을 보호하려고 ‘고르반’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눅16:14절에,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님이 말씀을 선포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럴 때에 누가가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에게 돈을 좋아한다고 하면 굉장히 치욕적인 것이고 치명적인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직설적으로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종교를 통해 치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황폐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막 8:15절에 “삼가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교만 , 냉소를 말하는데 누룩은 부풀리는 것이 있는 것처럼 저들의 죄와 악함이 굉장히 강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헤롯을 대동하게 해서 비유합니다. 이들은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데 이 두 가지 부류를 놓고 예수님은 동일하게 “저들의 누륵을 조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대놓고 죄를 짓든지 그렇지 않든지 사실상을 똑 같다고 보신 것입니다. 돌짝밭이나 가시넝굴이나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무게감을 아는 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적인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못하고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고 합니다.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음식입니다. 음식법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결과 상관이 없고 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깨달음이 없는 것을 책망하면서 예수님이 해석을 하십니다. 음식은 들어왔다가 밖으로 나간다고 하십니다. 마가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모든 음식을 깨끗한 것이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마가는 아마도 로마에서 이 글을 쓰고 있을 것인데 로마에는 이 음식법에 문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마가는 이방인들을 적극적으로 편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아마 십계명하고 다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첫 번째는,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에 대한 비유를 많이 가르쳐주십니다. 구약에서 신약까지 꾸준이 나오는 것이 마음의 문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인의 인간론의 핵심은 사람의 중심부가 있고, 그 중심부가 사람의 전체를 콘트롤한다는 것입니다. 심령은 우리의 콘트롤 타워와 같은 것입니다 비행기의 조종석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이 마음을 통하여 발동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행동주의가 아니라 심령주의 입니다. 상담도 마음을 치유해야지 행동만 치유하면 위선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행동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치유하지 못합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심령이 우리의 영과 혼과 육체를 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굉장히 중요한 교육에 대한 말씀입니다. 가정에서 아이들과 계속 씨름하고 힘들어하는데 자녀를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잠언은 영혼의 생명력이 되고, 육체의 건강을 준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 상태에 따라 육체가 따라옵니다. 심령에 병이 들면 얼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너의 행동을 ‘무조건 시키는 대로 따라 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적 복음은 하기 싫어도 따라오라는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의 마음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7: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하나님은 심장을 살피시는 분인데 인간의 마음이 심히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죄를 재생산하는 인간은 심령이 부패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문학가들이 소설 중에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악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소설에서 아내가 모르는 곳에서 하고 있는 일이 잔인하고 사악한 문제라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범죄자들의 심리를 보면 너무 악하고 사악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심령이 저들과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악한데 이것을 콘트롤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억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문제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마음속에서 이런 악한 생각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마음에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런 것을 억누르고 정상인으로 살수 없습니다.

그러면 소망이 있는가? 성경의 답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외형적으로만 괜찮은 사람으로 옷을 입혀주시는 것이나라 심령을 다스려주십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의 구원은 행위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믿음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거룩하신 성령이 죄악된 우리에게 들어오시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피가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다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통하여 각자의 심령에 침투해오십니다. 새로운 생명이고 영적인 감수성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의 쎈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확신하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방향을 틀어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만들 수 없는 은혜입니다.
성령으로 우리 속에 침투해서 이루어주시는 전적인 은혜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마음에 성령이 침투해서 은혜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자격은 바로 그리스도를 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5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우리 마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계시기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고 우리 마음을 성전으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전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곳에 주님의 이름을 두신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성전을 가득 채우십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것은 생명의 물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그 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심령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 약속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으로부터 생명의 은혜의 샘물이 터져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것입니다. 이 여인을 ‘개’라고 주님이 말하십니다. 그 의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마가는 이방인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막 7:3-4에,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방인들의 편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여인을 ‘개’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두로에 가셨고, 이 사건이 성경에 딱 한 번 나옵니다. 마치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두로에 가신 것처럼 상황이 나와 있습니다.
가장 유대인적인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심령의 부패함’을 말하고 있고, 또 하나는 ‘더럽고 추하다’는 이방 여인에게서 믿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이 이방여인은 믿음의 행위를 합니다. 들었고, 왔고, 엎드렸고,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주여’라고 고백합니다.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님의 잔치에서 주인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발 아래서 먹겠다고 합니다.

시편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기자는 성전 문지기로 있는 더 좋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내 마음에 두려움, 수치감, 자존감을 주님 앞에 내려놓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말이 우리의 심령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생수가 아닌가요?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점령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직면한 지금 이 순간에 두려움이 굉장히 크게 작용할지 모릅니다. 사방에서 조여 들어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에게도 코로나19의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지금도 병원에 계신 성도들과 분만을 앞두고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며 걱정을 합니다. 정상적인 영적인 교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 우울해지거나 영적으로 삭막해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도 마음의 문제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지나갈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에서 버틴 것처럼,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고기를 먹은 것처럼, 지금 상황에 대해 두려움이나 조초함의 이상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7,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구원은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세상의 모든 홍수와 같이 조여오는 느낌을 피할 길이 없지만 우리의 마음이 천상의 하나님 보좌 앞에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목회기도: 우리의 심령은 죄악되고 두렵고 초조하지만 이미 구원 받은 자로서 성령이 인도하시고 있기에 소망을 갖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하신 하나님 앞에 모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보좌에 올라가게 하소서. 어둡고 절망적인 고민들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생각하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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