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 극장안에 가득한 비웃음과 비명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06-12-09 07:36:00    조회: 2,987회    댓글: 0
잘 정리하지 못하여 같은 말의 반복이 많아 글이 길어진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와 기독교와 문화에 대해 함께 공부한 지체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

괴물이 반미 영화냐 아니냐에 대한 네티즌 설문조사가 있었는데 64%가 이 영화를 반미영화로 보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 질문의 결과를 보면
1)        맞다, 보고서 반미감정이 일어났다 (17 %) 
2)        맞다 그러나 반미감정이 일어나지는 않았다(19%) 
3)        아니다, 근본적으로 환경오염에 대한 영화이다 (24.5%) 
4)        아니다, 그냥 영화 그 자체로 즐겼을 뿐이다 (39.5%)

이 영화와 설문조사를 통해 얻은 생각이 있어서 적어봅니다. 한쪽에서는 이 설문조사를 통해 한국 관객의 수준이 꽤 높아졌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영화 그 자체로 즐길 수 있었다는 것에서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입장에서 볼 때 이 영화를 단순한 환경오염의 문제로 볼 수 밖에 없는 시각이 24%나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한국 관객의 수준을 의심하게 합니다. 사실 이 영화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의도한 선전적인 것이 있건 아니건 영화는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에 사회 이슈를 들어 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영화를 그 자체로 즐긴 관객들의 의미하는 것을 저는 좀더 긍정적으로 해석해 보고 싶은 소망이 있는데 바로 이들이 영화자체의 흥미와 함께 사회 반영적인 의미에서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며 여러 관객들의 웃음과 비명의 반응이라는 문화 소통의 현장에서 이러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과연 괴물은 무엇인가?  50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자라난 이 괴물은 어디에 있는 괴물인가?  아마도 이 괴물의 정체가 바로 이 영화가 고발하고자 하는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괴물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한국 사회에 이제 불거져 나오는 공포의 존재입니다. 한국 사회를 위협하고 자녀를 삼키는 존재로 자라난 괴물, 그 존재는 무엇일까요?

이야기는 인과 율의 관계에서 그 논리를 펼쳐가고 관객을 설득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괴물의 출처를 미국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괴물을 안일하게 키워 온 한국 사회와 정치 권력에 대한 비판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한강 고수부지에서 어렵 살이 매점을 운영하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인 노부(변희봉) 밑에서 매우 안일하게 살아 온 한 아버지인 강두(송강호)는 자신의 딸을 미군기지에서 방출된 페수의 화학 작용에 의한 돌연 변이이며 한강물을 먹고 자란 대한 민국의 괴물에게 잃어 버렸습니다. 노부에게는 3명의 자녀가 있는데 그 케렉터들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백수인 그의 둘째 아들 남일(김해일) 그리고 막내 딸인 양궁으로 꿈을 키우는 남주(배두나) 그리고 장남 강두는 지금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을 단면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이 중에서 강두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두는 부모로서의 책임과 능력을 상실한 미래가 없는 게으름뱅이로 보여집니다. 그는 딸의 미래를 생각해 줄 수도 없는 존재로 비추어지며 핸드폰이라는 문명의 이기로 점철되어 있는 신세대(또는 N세대)에게 고가의 핸드폰을 선물하는 것으로 부모의 사랑과 의무를 때우는 생각 없는 존재로 나옵니다. 그에게 있는 것은 딸에 대한 감상적인 부정 뿐입니다. 그러나 감상적 부정이라 할지라도 강두는 괴물에게서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지만 그는 딸의 구출을 실패하고 맙니다.  다른 구조대 역시 딸의 구조를 실패합니다.  그것은 한국에서 자라난 괴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딸의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매점에 들어와 물건을 훔치던 아이가 일종의 양자로 강두와 살아가는 아이러니를 보여 줍니다.

저도 이 영화에 반미적인 성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주된 초점은 한국 사회에 대한 회의주의라고 봅니다. 전후세대의 일명 헝그리 정신의 상실을 강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아 성찰의 강조점이 강하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현재 한국은 정체성 확립에 공동 사회적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한국화 하려는 의지가 강합니다. 괴물의 정체는 영화 밖에서 보면 디지털로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사회의 괴물은 만들어진 것이라는 디지털로 만들어진 이 괴물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괴물의 싹을 자르던지 아니면 괴물이 자라지 못하게 하라. 한국 사회의 괴물의 탄생과 성장과 그 결과를 그린 역사성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가족 영화라고 말합니다.  사실입니다. 한 사회의 가족은 그 사회를 반영합니다. 특별히 3대의 가족은 한 세기를 충분이 현실성 있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괴물의 출현은 운명적인 불운이지만 그것을 방치하는 한국 사회와 정치 권력 그로 인한 피해를 입고 사는 소시민의 불행 그래도 이 불행의 원인에서 결코 변명할 수 없는 시민을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인 “살인의 추억”에서도 봉감독은 한국 사회와 권력 구조 안에서 갈등하는 힘없는 강력계 형사의 고충을 표현하는데 살인자와의 싸움인지 사회 구조와 권력과의 싸움인지 분간이 안 되는 혼돈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봉 감독은 사회학과 출신으로 이러한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과 관심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 영화는 결코 미국만을 탓하거나 반미 감정을 일으키려 의도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오히려 불운을 자초한 한국 사회와 국민성에 대한 풍자가 강한 영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 영화든 인과 율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함께 그 해결을 영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하고 있습니다.  괴물은 어떻게 무찔렀는가? 바로 강두의 감상주의적 부정, 그리고 취직도 못해 본 남일의 아직 펼쳐 보지도 못한 재주의 가능성 그리고 우승의 찬스를 놓쳤지만 꾸준하게 자신의 성공을 양궁에 건 남주의 스포츠 정신이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의 대처로 괴물을 무찌릅니다. 여기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봉준호 감독의 낙관주의라고 보아야 하는 것인지 웃지 못할 블랙 코메디로서의 회의주의적인 표현일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회의 문제 해결은 시민 또는 국민의 변화에 있다는 자아 성찰적인 메시지가 강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괴물… 그 존재가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간섭에 의해 생겨난 것이건 아니면 아니면 한국 정치권력의 문제점이 눈뭉치처럼 불어난 현정권을 포함한 모든 정권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건 괴물은 선동적인 케랙터가 아닌 한국 사회의 자화상일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강두와 자신의 딸의 위치를 아이러니하게 차지한 사내 아이와의 관계가 부자 관계로 표현되어지는 장면에서 한국 사회의 영성(spirituality)을 보게 됩니다. 이제 강두는 자신의 딸을 괴물에게서 잃어버리고 꽤나 성숙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내 아이가 혈통적으로 자신의 아이가 아닐찌라도 이제는 그 아이에게 이전 자신의 딸에게 있어서 아버지였던 감상적 부정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한국 사회의 영성은 변화를 추구합니다. 리더쉽에 있어서도 변화를 추구하고 자신의 정체감에 있어서도 변화를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명상과 득도라는 것에 심취해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 중에는 감성표현이 강하며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강하게 표출하는 춤에 목숨을 겁니다.  남들이 걷지 않은 방법으로 삭람들은 살아가야 한다고 외칩니다.  김치찌개하나도 그냥 팔리지 않습니다. 묵은 지라고 하는 3년 숙성된 김치로 만든 김치찌개만이 팔립니다. 한국 사회는 깊이 있고 순전도가 높은 그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복음을 표방하는 교회가 복음의 순전도를 잃고 상업주의에 물들어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게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 역시 믿을 수 없는 괴물로 보여지는 것 같습니다.  황폐한 영성, 그러나 갈구하는 구원의 열망… 그러나 더 가슴 아픈 것은 그것을 “하면 된다” 라는 자기 최면에서 찾아 내려 하는 한국 사회의 주관적 낙관주의의 위험성과 자포자기적 회의주의는 또 다른 괴물을 키워 가는 것 같습니다. 괴물이라는 영화는 사회풍자와 성찰에서 한 개인의 영성에까지 깊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영화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비웃음을 던지지만 이내 개인의 텅빈 내면 세계의 들어남에 비명합니다. 극장은 당연히 웃음과 비명으로 가득 찰 수 밖에 없겠죠.

이 사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강두, 남일, 남주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괴물을 키워낸 원인임과 동시에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회의주의적인 아이러니는 눈이 먼 자가 대낯에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막연한 기대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근본적인 눈이 떠지는 사건, 걸을 수 없는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는 사건, 그들 스스로 알 수 없으나 실제적으로 원하는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이 한국 사회 곳곳에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믿음은 어떻게 얻어질까요? 낙관주의와 믿음의 차이를 한국 사회가 볼 수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두고 믿음으로 기도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히 11:1)  사실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을 보고 싶은지도 모르는 인간의 완전 타락의 해결인 2000년 전 그 사건에 대한 확신과 그 완성의 날을 기대하며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는 새로운 백성인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또 다른 그러나 유일한 하나의 목소리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