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하배 목사님의 삶과 한국 선교>
뉴저지 노회 소속의 간하배(Harvie Conn) 목사님은 1960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해외 선교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이전에는 1957년 5월 목사안수를 받은 후 국내 선교사(home missionary)로 3년 동안 사역하셨습니다. 간하배 목사님은 정통 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교단 내에서 최초로 국내 선교에서 해외 선교로 사역의 분야를 바꾼 분이셨습니다.
간하배 목사님은 로버트 처칠(Robert Churchill) 목사님이 캘리포니아 주 Berkeley에 있는 Covenant Church에서 사역하시던 기간에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이 교회에 출석하기 전에는 그 어떤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중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교회 출석을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소개를 받아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주일학교에 나오는 주된 이유는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였을 뿐이었으며, 교회 출석은 매우 불규칙적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학생으로가 아니라 장난꾸러기로 유명했습니다. 교리문답을 공부하는 시간에는 오히려 그림 그리는 일에 더 열중했으며, 목사님의 눈에 가시와 같은 학생이었습니다. 간하배 목사님은 아주 효과적으로 가시의 역할을 했습니다. 주일학교에 올 때면 언제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 움큼의 연필을 가지고 오곤 했는데, 선생님이 연필 한 자루를 빼앗아가면 또다른 연필을 빼내어 그림을 그릴 정도였습니다. 당시 주일학교 교사였던 어떤 분은 회상하시기를, 다른 학생들은 몰라도 간하배 목사님만은 결코 신앙인으로 자라지 못할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학생들은 모두 교회를 떠났지만 간하배 목사님은 떠나지 않고 남아 있으셨습니다.
1949년, 간하배 목사님은 회개와 믿음 그리고 기독교적인 삶에 대한 진정한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그 이후 정기적으로 주일학교와 교회 예배에 출석하게 되었고, 1950년에는 작은 교회에 참석하셨습니다. 그 분의 회심을 이끈 요인들 중 하나는, 당시 기독교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 주관으로 매년 여름 열렸던 성경 캠프였습니다. Berkeley 교회는 매년 이 캠프에 학생들을 보냈습니다. 또한 안식일 준수에 대한 강력한 설교로 인하여 간하배 목사님은 죄에 대하여 깊이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로 인하여 간하배 목사님은 그리스도와의 확고한 교제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1951년 칼빈대학교에 입학하여 1954년 문학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1954년,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였지만, 목회 사역이나 가르치는 사역을 생각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들어가셨습니다. 신학교에 다니던 중 여러 상황으로 인해 간하배 목사님은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3년 동안 매해 여름이 되면 뉴잉글랜드 지역의 OPC 목사님들과 버클리에 있는 목사님들을 도왔는데, 주일학교와 여름성경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셨고 집집마다 방문하여 전도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 후 알버트 에드워즈(Albert Edwards) 목사님의 권유를 받아 뉴저지의 Stratford에서 주일학교 사역을 도왔습니다. 뉴저지 Bellmawr의 임마누엘 교회의 감독 하에, 그리고 당시 Bellmawr 교회를 담당하셨던 에드워즈 목사님의 주도 하에 시작된 이 주일학교 사역이 점점 더 확장하여 더 많은 사역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간하배 목사님은 West Collingwood 교회의 칼 라이츠마(Carl Reitsma) 목사님과 함께 번갈아가며 매주 아침 Stratford에서 설교하셨습니다. 주일학교를 지도하고 주일 오후 사역을 돕는 일에 간하배 목사님이 신학생의 신분으로 1955년 가을부터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즈음, 간하배 목사님은 교단 내 한 기독교 대학의 총장과 인터뷰를 갖게 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학교에 영어과 교수가 새로 필요했고, 목사님은 이 자리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교수직을 시작한다는 것은 곧 신학 공부를 그만두고 전혀 다른 분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 간하배 목사님은 –“사역을 계속하라”는 에드워즈 목사님의 부드러운 권면에 영향 받아- 교수로서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시기에 목사님은 앞으로 해외 선교에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해외선교부에 지원하셨습니다. 이러한 결정에 이른 데에는, 당시 동아프리카의 Eritrea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던 칸(Conn) 여사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57년에는 Stratford에서 전도목사로 안수를 받으셨습니다. 그 후부터 1960년 가을에 한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목사님은 Stratford에 있는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사역 기간 동안 교회가 조직되었으며 교회 건축이 이루어졌습니다. 1958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1960년 여름, 미국 내에 있는 독일 개혁교회(German Reformed Church)의 Eureka 교구에서 간하배 목사님의 한국 사역을 후원하기로 결정하였고, 목사님의 가정은 미국을 떠나 1960년 가을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한국에서의 첫 2년은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언어 공부 과정을 마치자 마자 곧바로 간하배 목사님은 한 기독교 라디오 방송국에서 한국어로 설교하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방송은 주로 북한에 있는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남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방송을 통해 전해지는 설교에 대한 반응이 좋아, 목사님의 설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책자로 등사되어 배부되었는데, 특히 1965년, 빌립보서에 대한 강해 설교 시리즈는 책의 형태로 출판되기까지 했습니다. 이 방송 프로그램이 시작된 이후로 3000여 권에 해당하는 소책자 라디오 설교가 청취자들에게 배송되었습니다.
간하배 목사님은 또한 서울에 있는 총회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1965년에는 신약성경을 가르치는 정교수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이 때까지 목사님은 교회사와 변증학 분야의 과목들을 주로 가르치셨습니다. 1965년 3월에는 서울신학교의 도서관 사서로 임명받으셨습니다. 가르치는 사역과 연관하여, 목사님은 수업 시간에 사용할 목적으로 여러 강의안들을 준비하셨고, 정기적으로 신학교의 저널에 논문을 기고하셨습니다. 신학 과목을 가르치고 논문을 기고하는 이 모든 일들을 목사님은 한국어로 하셨습니다. 1964년에는 간하배 목사님의 사모님께서도 서울신학교의 학부 학생들에게 매주 두 시간씩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말에는 시골에 있는 교회들을 찾아가 전도여행하는 일에 시간을 쏟으셨습니다. 간하배 목사님의 초창기 한국 선교 사역에 있어서 가장 특이한 사실 중 하나는, 목사님께서 수많은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쏟으셨다는 것입니다.
1965년 여름, 간하배 목사님 가정은 초기 선교사역을 마치고 잠시 귀국하셨습니다.
간하배 목사님과 사모님에게는 다음과 같이 네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David Murray(1957년 8월 1일생), Elizabeth Ann(1959년 4월 28일생), 그리고 쌍둥이 Peter Maitland와 Andrew Diedrich 형제(1963년 1월 20일생)
<위 글은 간하배 목사님의 초기 한국선교사역에 관련하여 미국 OPC 교단의 해외선교부에 보고된 자료입니다.>
<간하배 목사님과 도시선교>
그 분의 얼굴은 도시를 향하고 있었고, 그 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로 아파했습니다. 목사이자 선교사이며, 신학교 교수, 신학자, 그리고 선교학자였던 간하배(Harvie Maitland Conn) 목사님께서 1999년 8월 28일, 이 땅에서의 순례 여행을 마치셨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암이었습니다.
12년간 한국 선교사로, 25년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로 사역하는 가운데 간하배 목사님께서 남기신 가장 중요한 유산은 교회로 하여금, 특별히 개혁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공동체로 하여금 도시 선교에 관심을 갖게 한 것입니다.
간하배 목사님은 12년간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셨는데, 놀랍게도 여러 권의 책을 한국어로 지으셨고, 심지어는 한국어로 설교학을 가르치실 정도였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윤락 여성들을 대상으로 전도하셨던 모습은 목사님의 복음 전도에 대한 관심, 즉 죄인들인 동시에 죄의 피해자들인 사람들을 향한 목사님의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1972년부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 생활을 시작하셨고 변증학과 선교학을 주로 가르치셨습니다. 선교에 대한 목사님의 관심이 마침내 전문적인 학문적 연구의 중심 주제가 된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간하배 목사님은 강의를 매우 흥미롭게 잘 하는 교수님으로 인기 있었던 동시에, 학생들에 따르면, 또한 가장 많은 과제를 요구하는 교수님으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간하배 목사님은 교회와 선교를 변화시키는 신학을 추구하셨습니다. 언약이나 하나님 나라, 구속사 등과 같은 개혁주의 신학의 주제들을 연구하면서, 또한 게할더스 보스, 헤르만 리델보스, 리차드 개핀, 에드먼드 클라우니 등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간하배 목사님은 기존의 교회 모델과 사회적 상황을 변화하고 갱신하는 변혁적 신학(transformational theology)을 발전시키셨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교회에 대한 목사님의 비전은 그보다 훨씬 더 넓었습니다. 그 분은 단순한 서구 교회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교회가 주체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는데, 바로 이 믿음이 그 분의 신학 사상 전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간하배 목사님의 유산은 다음과 같은 여러 책과 글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Eternal Word and Changing Worlds: Theology, Anthropology, and Mission in Trialogue (1984), A Clarified Vision for Urban Mission: Dispelling the Urban Stereotypes (1987), The American City and the Evangelical Church: A Historical Overview (1994) 등의 선구자적인 책들을 지으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동료 교수였던 마누엘 오티즈(Manuel Ortiz)와 함께 쓴 The Kingdom, the City and the People of God도 곧 출간될 예정입니다. 간하배 목사님은 또한 목회학과 해석학 뿐 아니라 교회 개척과 교회 성장에 관한 책을 여러 권 편집하셨는데, 그 중 가장 최근에 출판된 것은 Planting and Growing Urban Churches: From Dream to Reality (1997)입니다. 그 뿐 아니라, 간하배 목사님은 Urban Missions Newsletter와 Urban Mission을 비롯한 여러 신학 잡지에 글을 기고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다양한 분야와 주제를 다루셨는데,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및 아프리카의 도시화, 봉사 사역의 역할, 조나단 에드워즈의 공공신학, 가정 생활, 교회 성장, 젊은이 목회, 복음 전도, 교회 생활 등에 관하여 글을 쓰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흑인 목회자들과 빌 크리스핀(Bill Krispin)에 의해 세워진 Center for Urban Theological Studies(CUTS)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CUTS 학생들과의 교제를 통해 목사님은 지속적으로 사역과 신학 교육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학과 관련하여 간하배 목사님이 남기신 가장 큰 업적은 도시의 중요성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목사님은 교회가 도시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유행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도시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당시 유행과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내용과 인구조사 자료를 고려해 본 결과, 이 세상의 도시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목사님은 생각하셨습니다. 간하배 목사님은 주장하시기를, 세상은 더 이상 지구촌(global village)이 아니라 지구시(global city)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처하고 있는 상황이자 직면하고 있는 도전이며, 이 일에 있어 효과적으로 사역하기 위해 교회는 도시에 대하여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단지 도시의 중요성을 일깨우셨을 뿐 아니라, 도시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도 바꾸셨습니다.
도시에 대한 간하배 목사님의 신학은 성경의 구속사적인 이야기의 구조로부터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도시와 관련하여 가장 좋아하는 성경 본문이 어디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도시 사역에 대한 저의 관점을 요약할 만한 단하나의 성경 본문을 꼽는다는 것은 저로서는 너무 경이롭고 또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이 너무 경이로운 이유는 제가 성경의 어느 부분을 펼칠 때마다 모든 본문들이 저를 향하여 “도시”라고 외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너무 위험한 이유는 제가 하나의 본문을 선택하게 되면 다른 본문에 담겨 있는 너무나도 중요한 내용들을 빠트리게 되고, 결국 전체의 그림을 왜곡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의 내용을 대할 때, 우리는 도시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계속되는 이야기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간하배 목사님은 사도 바울이 “외부인들”(outsider)을 향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에 영향을 받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남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과 북아메리카의 흑인 신학, 그리고 다양한 여성 신학자들과 어떻게 대화하셨는지를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신학들에 대하여 예리하게 비판하셨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교회가 복음의 총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귀기울여야 할 의미심장한 도전들이 해방신학/흑인신학/여성신학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목사님은 발견하셨습니다.
간하배 목사님은 종종 “예수님께서는 남은 것들과 남은 자들을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목사님이 가지고 계셨던 기독론에 따르면, 예수님은 도시를 위하여 희년의 의미를 온전히 실현하셨던 가난한 분이셨습니다.
기독론과 도시선교, 말과 행동은 목사님에게 있어 사실상 하나에 속했습니다. Eternal Word and Changing World에서 간하배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참되고 전체적인 의미에서 공동체적인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가난한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평화에 헌신하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고전 1:27-28). 우리의 신학이 혁명적인 것이 되기 원한다면, 예수님께서 그 분의 주장을 증명하셨던 방식대로 우리 또한 우리의 신학을 증명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신실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그 분의 설교를 특징지웠으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눅 4:18-21). 병든 자와 눈먼 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일은 의심 가운데 있던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의 메시아되심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 11:2-6). 우리의 신학 또한 이러해야 합니다. 어디에서부터 우리가 시작해야 할까요?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도시의 빈민굴에서, 공공 병원의 대기실에서, 실업자들 가운데서, 여러 복지 기관들 등의 장소에서 그들과 함께 앉음으로써 우리의 신학을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져야 할 필수적인 사명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은 목사님께서 쓰신 한 책의 제목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복음전도: 공의를 행하고 은혜를 선포하는 것』(Evangelism: Doing Justice and Preaching Grace)
간하배 목사님께는 몇 가지 독특하며 잊을 수 없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목사님께서 혼자서 일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관련하여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관점을 주장하시는 가운데 많은 어려움에 부딪쳐야 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목사님은 또한 유머감각과 따뜻한 웃음으로도 유명하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하던 시절, 저는 도서관에서 목사님을 찾으려 한 적이 전혀 없었지만, 언제나 도서관 내의 정기간행물실 주변에서 들리는 목사님의 웃음을 통해 도서관에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간하배 목사님의 웃음은 마치 따뜻한 ‘악수’와도 같이 사람들을 환영하며 초대하였습니다. 아마 목사님께서 자기 자신이 한 농담에 스스로 웃으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웃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웃게 만드는 최고의 이유였습니다.
간하배 목사님은 자신의 건강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들을 전혀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건강과 아내 도로시(Dorothy) 여사의 건강으로 인하여 웨스트민스터를 떠나야 했을 때, 목사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업적에 주목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그 분의 한결 같은 성품이었지만,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영향력에 감사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결단코 자기 자신에게 공을 돌리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 분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셨습니다. 몇 년 전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의 내용이 기억납니다. “40여년 전, 아내와 저는 동방박사의 길을 따라 그 분의 별을 뒤따르기로 선택했습니다. 그 후 저희는 예수님이라는 별을 바라보며 살아 왔습니다. 그 분은 여전히 앞서 행하시며, 우리는 여전히 뒤따라갑니다. 늘 지혜롭거나 늘 순종적으로 뒤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언제나 소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간하배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나 강의, 책을 결론지을 때 여러가지 질문을 쏟아붓기를 즐겨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한 동기는 자신의 예언자적 사역을 수행하고자 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면 그렇게 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던’ 그 분의 방식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둘 다의 이유에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에서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간하배 목사님의 삶과 그 분의 유산을 기억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교회는 온 세계의 도시를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신학 교육은 여러 어려움에 잘 대처할 것인가? 신학적인 주제들에 있어서 선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허용할 것인가?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가난한 자들을 향한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위하여 교회는 변화할 것인가?
진심으로 간하배 목사님은 도시를 위한 복음전도자로서, “세상이 믿도록”(요 17:21)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선포하던 분이셨습니다. 도시를 위한 복음전파에 쏟아부어진 그 분의 열정으로 인하여,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도시가 선교의 중심 영역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도시 안에서 예수님이라는 별만을 바라보며 그 분의 뒤를 좇았던 간하배 목사님의 모습이 우리 삶에 영향을 끼쳐, 우리 또한 목사님이 그토록 뒤따르려 했던 그 예수님을 위해 신실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마크 고닉(Mark R. Gornik) 목사
뉴욕, 1999년 8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