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깨끗한 부자가 될 수 있나? [1]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05-07-22 13:26:26    조회: 4,694회    댓글: 1
쥬빌리 제자원 (2005년 여름학기)
주제: 청지기적 제정관리 -
(4) 미국에서 깨끗한 부자가 될 수 있나?
강사: 박성일 목사

1. 청부론에 대한 논쟁

김동호 목사(높은 뜻 숭의교회)의 저서 “깨끗한 부자” (2003)가 출판된 이후 한국 교회 내에 “청부론”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있었습니다. 특히 김영봉 목사(전 협성대학교 교수)가 반박으로 써낸 “바늘 귀를 통과한 부자”라는 책 이후 지상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 되었습니다. 김영봉 목사는 “청부론” 보다는 “영성적 가난”을 추구하는 것, 즉 자기에게 주어진 부를 적극적으로 누리기 보다는 영적 삶을 위하여 누림을 포기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반면 김동호 목사의 “깨끗한 부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책 중 몇 부분을 옮겨 봅니다.

“기독교인들의 돈에 대한 신학과 신앙은 대개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물질을 터부시하는 유교적인 물질관이며, 다른 하나는 물질을 축복으로 여기는 기복적인 물질관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물질관으로는 기독교의 물질관을 설명할 수 없다.”

“돈은 복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누구나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돈은 복이 아니라 은사라고 했다. 신앙인으로서 물질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물질은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 . . . 그러므로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 . .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인생의 목표로 삼을 만큼 중요하지도 않다.”

“부자 중에 소유형의 인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부자 중에도 삶의 의미와 목적을 존재에 두고 사는 사람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사람이 욥이다. 욥은 소유가 많은 부자였으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단지 소유에만 두고 사는 소유형의 인간은 아니었다.”

“소유 가치를 팔아 존재 가치를 높이는 사람이 되라”

“의로운 부자는 자기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을 위해 큰 돈을 벌고 쓸 줄 아는 사람이다.”

“예수 믿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욕심내고 도전해야 할 것은 우리가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어서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사는 일이다. . . . 좋은 차를 타고 넓은 집에서 사는 것을 무조건 비판적으로 보는 세상은 절대로 발전할 수 없다. 부함과 강함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눈을 가져라. 부함과 강함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자세를 버려라. 할 수 있는 대로 강한 자가 되라. 높은 자가 되라. 부한 자가 되라. 뛰어난 사람이 되라. 그렇게 되기를 힘쓰라. 바울이 하나님을 위해 로마 시민권을 쓴 것처럼 부함과 강함을 주님을 위해 선용하라. . . . 돈에 대해, 세상에 대해, 권력에 대해 반듯한 믿음의 자세를 갖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즉시 천국 열쇠를 주셔서 우리 마음대로 이 따에서도 풀고 매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부자도 되고 권력자도 될 것이다. 세상의 부자와 권력자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부자와 권력자가 될 것이다.”

이 후 김동호 목사는2005년에 출판된 “행복한 부자를 위한 5가지 원칙”이란 책에서
“1. 돈에 매어 살지 말고 돈을 지배하며 살아라. 2. 정직은 신용이 되고 신용은 돈이 된다. 3. 깨끗한 빈자가 아니고 깨끗한 부자가 되라. 4. 내가 벌었다고 다 내돈이 아니다. 5. 진정한 삶의 행복은 소유가 아니고 존재가 결정한다”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즉, 청부론에 대한 그의 입장이 수정되지 않고 더 큰 확신 속에 전파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동호 목사는 나눔의 삶에 대하여 상당히 파격적인 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수입에 약 3분의 1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구분하여 드리는 것이 건강하다고 진단하면서 그 외에 것을 가지고 당당하게 주신 부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들으면서 소위 “부자들”이 위로를 받을지 부담을 느낄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김동호 목사의 주장을 살펴 보면 건전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점도 있습니다.

“청부론”을 반박하는 사람들의 상황적인 비판은:  1. 한국의 빈부의 심각한 격차를 생각 할 때, 즉 성실한 노동을 통하여 부를 창출하는 자체가 불가능한 사회에서 청부론은 설득력이 없다. 2. 청부론은 약간의 선행을 통해서 부자들의 양심을 편안하게 해 주는 면제부 역할을 할 뿐이다. 3. 청부론은 대교회 목사들의 부요함과 권력의 자리에서 나오는 자기 정당화에 불과하다. 

저 역시 성경적 원리를 기준으로 “청부론”을 생각해 볼 때 몇가지 우려점이 생깁니다: 1. 돈 또는 경제구조 자체가 영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은 것을 인정한다면 부의 축적 자체가 중립적일 수 있다는 주장은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2. 의로운 부자들이 부자로 당당하게 사는 것이 그들의 권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 욕심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돈과 맞물린 인간의 죄성에 대하여 너무 소극적인 입장일 수 있다. 3. 예수님께서 부자들에게 선포한 심각한 경고에 대한 깊은 고민이 결여된 주장일 수 있다.  4. 부자가 되면 하나님을 더 크게 섬길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다. 도리어 “가난을 힘”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경우가 더 많다.
 
어째든 김동호 목사가 날마다 외치는 “고지를 점령하라”는 메세지가 수많은 젊은 엘리트의 마음을 움직였고 오늘도 신앙적 양심을 지닌 지도자로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주도해 나가는 인재들이 되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 사회에 뛰어 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2. 과연 미국에서 깨끗한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미국이나 한국이나 상황은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낼꺼 다 내고, 드릴 것 다 드리고, 나눌 것 다 나누고 여전히 많은 것을 누리는 것 또는 부자이기 때문에 전략적인 위치에서 하나님을 더 큼직한 방법으로 섬긴다는 것에 대하여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제 당신은 청부(깨끗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라고 칭찬을 듣기에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부자”란 말의 정의 부터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1) 성경이 지적하는 부자의 일차적인 문제는 더러운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이익은 하나님의 공의의 범주를 떠난 모든 수입을 말합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 . .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약5:1,4-6).

(2) 부자들의 두번 째 문제는 자신의 부를 맘 껏 누릴 자격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감입니다. 부자들이 받는 책망은 저들의 삶의 자세의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던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누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어리석은 부자 (눅12:13 이후)처럼 자기가 수고하여 거둔 거대한 수확에 대하여 조금도 마음에 부담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거두어 두렸으니 맘껏 누리는 것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린석은 부자가 자기의 종들에게 정당한 일의 보수를 하지 않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단 스스로 쌓은 부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의 누림의 정당성 (entitlement)가 문제일 뿐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눅16:19이후)에서 부자의 잘못이 있다면 이웃이 고난 중에 있을 때 부자는 그것과 아무런 상관 없이 스스로 좋은 것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는 평가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선언의 말씀 바로 이후에 나오고 있습니다. 

(3) 부자들의 문제는 스스로 능력이 있는 자들이며 힘이 있는 자라는 생각입니다. 즉 자신의 부에 대하여 자신감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의 힘에 굴복한 사람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동네에서 비교적 큰 집에 살았던 어린시절 . . .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다쳤는데 애들 얼굴이 창백해 졌던 기억. “얘, 부자집 아들인데!”).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십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한마디로 성경이 지적하는 “부자”는 “재물을 섬기는 자” 또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자”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돈이 있기 때문에 안정감과 힘을 느낀다는 경제적 구원론 (economic salvationism) 입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부론”이 누구에게 든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방법으로 이해 된다면 이는 당연히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지닌 자로써 부를 축적한 자의 진정한 회개는 경제적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삭게오의 경우 그것을 스스로 수용했고, 한 부자 청년은 그것을 수용할 수 없어 슬픈 기색으로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경제적 특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경우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부자”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께서 떠나라고 하실 때 소유가 아까워서 떠날 수 없다면, 경제적인 안정 때문에 디아스포라의 정체를 포기해야 한다면 난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부자”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부”의 문제가 단순히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좀더 근본적인 이슈가 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에 푹 빠져 있는 이상, 즉 나도 한번 부자가 되어서 세상에서 포커스를 받으며 큼직하게 살아보자는 생각에 잡혀 있는 이상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본연의 모습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나에게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질”(물질적)의 선이 확고하게 그어져 있다면 난 큰 영적 핸디캡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난 하나님이 외에 다른 무엇의 포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3. 깨끗한 청지기는 있어도 깨끗한 부자는 없습니다.

내게 맡기어 주신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 충성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나는 물질에 대하여 loyalty을 갖고 있지 않은가? 나를 움직이는 것이 물질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인가? 이런 고민이 하나님의 사람의 고민입니다.

중요한 key는 나의 물질 생활 전반에 있어서 (하나님께 드릴 만큼 다 드린 후의 것에 대한 경우라도)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소명이 물질에 대한 관심을 뒤덥고(override) 있는가, 아니면 물질에 대한 관심이 하나님의 소명을 뒤덥고 있는가?”

진정 마음이 가난한 목사를 본 적이 없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결국 목사도 사람의 인정, 칭찬, 일의 댓가를 따라 산다는 것이지요. 남들이 얻은 영광과 부를 내가 얻어낼 능력이 없음을 한탄할 뿐이지 누구든지 그 곳에 있다면 다 심령이 부패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어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있다는 따끔한 평가입니다. 과연 놓고 떠날 수 있을까? 스스로 목회에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여기를 떠나더라도 난 언제든지 의미있는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특정한 사람들의 “떠남이 아닌 떠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 미래의 안정에 대한 확신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떠날 수 있는 진정한 디아스포라의 마음을 지닌다면 그 다음은 충성과 자족 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니라.” (빌4:11-13). 

내가 지금 재산을 많이 갖고 있는 부자라는 생각, 그리고 그 사실 때문에 안정감을 누리고 있다면 이미 난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부는 언제든지 내 손을 떠날 수 있기 때문에 꽉 쥐고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돈이 절대적인 가치를 누리고 있는 현 사회 속에서 물질에 몰두되지 않고 소명의식에 몰두되어 살기 위해서는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즉 나의 마음이 돈에 대한 욕심으로 치우치지 않게 되기를 기도하고, 아울러 나의 건전한 노동에 대한 적절한 댓가를 얻을 수 있도록 환경을 인도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결국, 아굴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을 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잠언3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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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끗한 부자가 없다는 말은 돈을 벌려면 깨끗해서는 벌 수 없다는 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