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상영 후 읽었던 글을 올립니다. [1]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06-03-29 12:47:49    조회: 4,146회    댓글: 1
“다른나라”는 북한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The Game of Their Lives” (66년도 영국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이기고 8강에 올랐던 북한 축구팀에 대한 영화)의 감독이었던 영국의 Daniel Gordon이 기획하고 감독한 다큐멘타리입니다. 북한 정부는 Gordon 감독에 대하여 대단한 호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하지 못했던 북한 사회의 실제 모습을 대대적으로 영상화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BBC와의 인터뷰에서 Gordon감독은 간결하게 그의 제작 의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즉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핵문제로 세계 뉴스의 중심에 있던 북한의 실제 모습을 영상에 담고 싶었던 것입니다. 북한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서구 사회에게 그곳 주민들의 매일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동기였다는 것입니다. 북한 쪽에서는 그들이 2002년 부터 시작한 “아리랑 축제”의 프로모션 차원에서 매스게임에 대한 다큐멘타리에 대하여 무척 반갑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어쨋든 이 다큐멘타리 영화가 받은 2개의 국제 영화제 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평양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입니다. 북한 정부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결론을 내려도 무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Gordon 감독은 자기의 의도와는 달리 이 영화가 북한 주민의 보편적인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북한 정부가 지정해준 가장 그들 관점에서 가장 모범적인 가정들이 중심이 되었고, 그들은 분명 북한의 “show case” 도시라고 하는 평양에 사는 특권층 중에서도 가장 특권층에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이 북한 주민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것을 전제한 가운데 Gordon감독이 북한에서 만난 모든 주민들에 대하여 내린 결론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인터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북한 주민의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특히 평화의 시기라면 모르지만 항상 미국의 침략의 위험 속에 있다고 믿는 그들에게 조금도 흔들릴 겨를 조차 없다. 이락 전쟁은 이러한 저들의 생각에 더 큰 확신을 심어 주었다.”  또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삶의 현실에 대하여 대단한 만족감 (extremely happy)을 갖고 살고 있었다. 저들은 서구의 그 무엇이라도 부러워 하지 않는 눈초리였다.”
 
과연 Gordon감독은 아무런 가치 평가 없이 이 영화를 제작했는가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영화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보고 북한 주민의 삶을 그린 “human drama”라고 각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곳도 살만하구나 하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과연 Gordon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저는 몇가지 결론을 내려 봅니다.

첫째, Gordon 감독은 북한 주민들에 대해서 깊은 연민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들의 관점이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런 면에서는 지극히 후 현대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삶을 비교적 인간적인 것으로, 또 나름대로 미화시킨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들의 이상한 사고와 오해가 있음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직접적인 무안을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가 언급한대로, 그들이 하고 있는 말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모순되는 네레이션을 피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그는 북한 체제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다큐멘타리를 보고 있는 관객들은 이 영화의 전개를 통하여 두 아동들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저들이 좋아질 수 밖에 없도록 영화는 진행되어 갑니다. 이렇게 attachment가 생긴 상태에서 끝 부분에 몇가지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킵니다. 우선, 매일 2번씩 20일간 계속된 “창당기념”(?) 매스게임에 그토록 고대하고 고대하던 김정일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아이들이 고대했던 것은 저들의 영웅 김정일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국정에 너무 바쁜 나머지” 저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줍니다. 또, 이 매스게임이 끝나자 마자 아이들은 또 다음 매스게임을 위해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막이 나옵니다. “누구도 다음 매스게임이 언제 있을지 알지 못했다.”  이건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문구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언제 이런 매스게임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분명 몇달 후 또는 적어도 일년 후 다시 매스게임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독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저들의 삶이 처해있는 상황의 무의미함을 나름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끝 부분에 삽입된 음악에 대하여 언급해 봄직 합니다. 마지막 아이들의 매스게임의 배경음악으로 삽입된 곡은 “침묵”이라는 제목을 가진 팝송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놓아 주세요.
        나의 증인이 되어 주세요.
        나는 밖에 서 있어요.
        나에게 평화을 주세요.

        하늘은 신비감(sense of wonder)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난 믿고 싶어요,
        언젠가 내 속의 광기(rage)가 녹아 없어질때
        난 그 속으로 들려 올라갈 것을 . . .

        이 하아얀 파도 속으로
        난 빠져들어가고 있어요.
        이 침묵, 이 하아얀 파도, 이 침묵을
        나는 믿습니다.

        열광(passion)은 꽃송이의 숨통을 막히게 합니다,
        그녀의 울움소리가 멈춰질 때 까지,
        그녀의 모든 아름다움,
        그러나 더 큰 아름다움에 굶주려 있는.

        하늘은 신비감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난 믿고 싶어요,
        언젠가 내 속에 광기가 녹아 없어질 때
        난 그 속으로 들려 올라갈 것을 . . .   

        나의 열망(longing)을 참을 수가 없어요.
        나를 위로해 줘요.
        내가 그 열망을 따라나서게 하지 않는다면
        난 터져 버리고 말거예요.

        하늘은 신비감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난 믿고 싶어요,
        언젠가 내 속에 광기가 녹아 없어질 때
        난 그 속으로 들려 올라갈 것을 . . .

        이 하아얀 파도 속으로 난 빠져들어가고 있어요,
        이 침묵 속으로.
        이 하아얀 파도를, 이 침묵을
        나는 믿습니다.

        난 너를 보았어,
        이 하아얀 파도 속에서 넌 침묵하고 있음을,
        그러나 넌 이 하아얀 파도를 숨쉬고 있었어.
        ~ ~ ~ 자유 ~ ~ ~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오리지날 곡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곡을 삽입한 감독의 의도가 엿보이는 장면입니다.

북한에 대한 문제는 핵보유에 대한 문제이거나 또는 민족공조의 문제, 즉 군사적이나 정치적인 문제이기 전에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문제임을 증명하는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저들의 종교적 세계관은 한반도 분단 이후 군림하고 있는 김일성 주의, 주체 종교의 철저한 주입교육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특히 아동들에 대한 주입교육은 일반 종교에서 하는 교리교육의 수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철저한 것입니다. 주체 종교에도 확고한 교리가 있습니다. 이 영화 내용 중에도 김일성 장군의 위대성의 세가지 요소, 영도적 위대성, 영웅적 위대성, 또 품성적(? 정확하게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위대성에 대하여, 그리고 장군의 뜻을 받들면 영원한 행복이 임한다는 교사의 열정적인 교리 교육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주체 종교의식은 주민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해석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들의 집단적 신앙경험이 되어 버린 “고난의 시기” 또는 “고난의 행군” (“The Arduous March”), 즉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던 근래의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원수 미제의 압박과 핍박 때문에 벌어진 무고한 고난이기에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의 인도에 따라 제국주의의 압력에 타협하지 말고 인내하여 견디어 내야 한다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김정일이 선포한 “선군정치,” 즉 군사력을 우선으로 하는 정치 이념 때문에 막강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민이 굶주리는 정도는 참아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주체 사상은 정치 이념이나 경제 이론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종교의 틀에서 밖에는 이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안에 인죄론, 구원론, 심지어는 종말론 까지 구비한 종교인 것입니다.

매스게임은 이 종교성을 표출하는 종교적인 페스티발 또는 열광적 “찬양집회”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Gordon 감독이 말하는대로 개인의식을 완전히 말살 시키고 전체주의에 완전히 순복하는 북한의 종교 이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쇼 중의 쇼”인 것입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한 선교(NK Mission) 방법이 몇가지 있습니다. 우선은 인도적 차원에서 식량을 수송하여 북한 주민의 굶주림을 채워 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북한 정부의 허락을 받아 의료, 식량 산출, 물품 생산, 심지어는 교육 등의 인프라 산업의 한 부분에 뛰어 드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영적 전투의 관점에서 기도운동, 영적 투쟁 운동을 벌리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간접적인 방법이 있다면 소수지만 중국의 동북 지역 등지의 탈북자, 또는 “조선족” 성도들에게 신앙 훈련을 시켜 북한에 투입 시키는 방법입니다. 모든 방법이 다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북한 선교는 장기전인 세계관의 싸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것은 당장 통일이 된다고 해도 계속 진행 될 영적 싸움이라고 여겨집니다.

현재 북한이 직면한 문제가 세계관의 문제, 즉 종교적 문제인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오늘날 북한을 직접 방문하고 김일성 동상 앞에서 머리를 숙이면서 민족공조의 전선에 서서 통일을 운운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 결국 일제시대 신사참배에 동조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신사참배에 동조했던 지도자들은 이것이 국가적 의례라고 주장했으며 신앙적 이슈라는 것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이제 북한과의 관계에서 김일성 참배가 동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정당화 된다면, 이러한 역사관을 가지고 신사참배 사건을 재 해석 한다면 (즉 이것은 신앙적 문제였기보다는 반민족적 문제였다) 이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적어도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문제가 민족의 관심 보다 더 심각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전쟁에 대한 재 해석이 한참입니다. 물론 80년대 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한국 전쟁은 한국 민족간의 내전이며 이 전쟁에 미국을 주축으로 한 외세가 관여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을 불필요한 미국의 참견이었다고 평가하는 것 처럼 한국 전쟁도 미국의 참전으로 필요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 전개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만일 그대로 두었더라면 한국은 통일 되었을 것이며 잠시 공산화 되었다고 하더라도 오늘 베트남이 국제 사회에 다시 문을 열듯이 한국도 역시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일단 미국의 개입은 한민족의 통일을 막는 거침돌이 되었다는 것이며 지금도 한민족의 통일을 막고 있는 것은 미국을 위시한 외세들이라고 연결지어 주장하는 것입니다. 만일 한민족의 단일화, 즉 “민족”의 개념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절대적 개념이라면 이런 주장을 받아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는 이런 주장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조물주 하나님의 신앙, 자유, 인격, 인간됨의 존엄성을 무시한 집단과의 공조가 같은 민족이라는 유일한 이유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면, 결국 민족주의적 결탁으로 유태인을 대량 학살시킨 나찌 정권 하의 인종차별주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민족에 대한 충성과 헌신 역시 창조주 하나님의 신앙 안에 바른 한계성 안에서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오직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한분 만이 절대시되기 때문에 협소한 민족주의나, 지역주의, 국가주의, 일정한 경제 이론주의에서 탈피하여 하나님 아래서 인류를 인류로, 인격을 인격으로, 문화를 문화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일정한 사람, 민족, 문화가 절대화 됨으로써 기회가 주어지면 무력을 통해 자기보다 약한 처지에 있는 타인, 타 민족, 타 문화를 핍박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힘있게 외칠 수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다시말해서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관심은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것이며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 하려는 모든 노력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입니다. 참 선교는 이러한 세계관에 입각하여 자유과 평등, 영적 해방, 사랑 등의 가치관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한단계 더 나가서 북한이 주체 종교로 부터 탈피한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채울 것인가 까지 고민해 봐야 할 것입니다. 중국이 모택동 공산주의의 옷을 벗은 후 경제 만능주의의 옷을 갈아 입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돈 역시 사람을 비인간화 시키는, 절대적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장 통일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의 여러 교단에서 바쁘게 북한에 교회 개척을 추진하고 전도를 펼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만일 예수 믿으면 잘먹고 잘살게 된다, 또는 영적 신비 체험을 할 수 있다, 등 오늘날 한국에 만연한 기복신앙이나 신비주의가 북한에 들어간다면 그것도 적지 않은 문제입니다. 중국의 가정 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그 안에 물질에 대한, 권위에 대한, 영적 체험에 대한 abuse가 적지 않기 때문에, 지성인들은 기독교를 선호하면서도 일반적인 가정교회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공산정부의 관리 아래 있는 삼자교회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적 세계관, 신학적 통전성을 갖고 있는 교육기관과 지도자들에 대한 갈증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NK Mission을 위하여 동북지역에 파송되어 있는 엄청난 숫자의 선교사들의 재교육이 심각하다고 느껴집니다. 아울러 북한의 붕괴 또는 개방과 함께 큰 영향을 미칠 “조선족 인테리”들, 그리고 북한에 다시 침투하여 복음 사역을 하려고 하는 탈북 성도들의 재교육이 시급하다고 느껴집니다.

북한은 “다른나라”입니다. 이 영화의 원제가 “A State of Mind”입니다. 이 제목은 말장난이 섞여 있습니다. 영어로는 Pun이라고 합니다. 여기 “State” 라는 단어는 국가란 의미도 있고 또 일정한 상태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제목을 직역하자면 “어떤 마음의 상태” 라는 의미와 함께 또 “심리적 국가” 즉 주민의 심리를 휘어 잡고 있는 Mind-control하는 국가라는 뉴앙스가 있습니다. 북한의 마음 상태는 예사로운 것이 아닙니다. 오직 창조주의 밝은 진리의 빛이 침투해야 만 변화될 수 있는 심각한 영적 질병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자유세계에서 맘껏 신앙 생활 한다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에 혹 김일성은 아니지만 다른 우상이 자리잡고 있다면, 우리 역시 심각한 세계관의 딜레마에 빠져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선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원리를 우리에게, 또 이웃에게, 또 북한의 주민에게 까지 적용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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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 이 글을 퍼다가 제 싸이 미니 홈피에 올리고 싶습니다.  분명 이 영화평을 circulation이 목적으로 해도 관계 없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