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하여 파송하는 교회
교인들이 바른 자아 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은 건강한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현대 교회들을 살펴 볼 때 교인들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교인을 소비자(consumer)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경제 원리는 무한 경쟁 시장 경제입니다. 모든 면에 사회가 이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경쟁력을 가지고 자기가 갖고 있는 제품을 소비자에게 팔아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소비자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가 비지니스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논리입니다. 현대인은 모든 면에 시장 경제 논리를 사용합니다. 직장, 비지니스는 물론이고 한 개인의 관계들도 이렇게 운영해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과거에는 주위에 자기를 알아봐 줄 수 있는 몇 사람의 친구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했을텐데 이제는 인터넷이라고 하는 새로운 매개체를 통하여 자기를 널리 알릴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싸이월드, 유튜브, 블로깅 등을 통하여 자기의 오디언스를 만들어 가고 자기의 이미지를 관리해 나가면서 자기에 대한 관심을 끌어 봅니다.
그런데 교회도 이와 같은 패러다임으로 이해가 됩니다. 교회도 비지니스라고 생각하는 경향은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목사가 교회를 개척한다면 개인 종교 비지니스를 열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제가 기쁨의 교회를 개척한다는 소식을 들은 대학 동창 친구가 “개업을 축하한다”는 메세지를 보내 왔던 것이 기억납니다. 교회가 비지니스라면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아주 당연해집니다. 담임 목사는 창업주, 또는 사장, 부교역자들은 종업원, 평신도 직원들은 자원 봉사자, 그리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소비자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많은 소비자를 확보하느냐에 있을 것이고, 헌금 액수가 많아지고, 교회의 시설이 확장되면 누가 보기에도 성공한 비지니스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즈음 대형화되는 교회의 담임 목사가 꼭 소유해야 할 자격 중에 좋은 커뮤니케어터, 좋은 이미지 메이커도 있지만 빠질 수 없는 것이 운영의 능력입니다. 담임 목사 스스로 자기를 CEO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학 교육 뿐 아니라 MBA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공부하는 목회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모델을 갖고 목회 하느냐는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모델로부터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비지니스 모델로 인하여 교회는 서비스 업체가 되고 목회자는 연예인처럼 행동하고 교인들은 관객으로, 또는 행복감을 쇼핑하는 소비자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욱 좋아할 음악, 설교, 프로그램 등을 제공할 수 있을까를 물어가면서 끊임없는 제품 개발과 광고가 감행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교회에 대하여 아주 다른 생각을 품고 계셨습니다. 교인을 “제자”라고 부르셨고,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비지니스 모델과 아주 다른 것입니다.
두 번째 잘못된 교인상은 교인을 교회를 운영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일꾼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교인을 제자라고 하는 말을 오해할 때 교인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주 은사가 많고, 또 타 교회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분이 새 교회를 찾아오시면 “저 분은 정말 일꾼입니다”란 말을 많이 듣습니다. 목사들은 일꾼들을 찾아 교회 각 분야에 일을 시키고 그렇게 교회라는 기관을 확장시켜 나가는 매니저 정도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일꾼들에게 효과적인 동기유발을 줌으로써 모두 불평 없이 만족감을 가지고 일을 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 성취감을 갖게 되면 교회가 잘 운영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부족한 모델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델의 관심은 기관으로써의 교회, 교인들끼리 모여있는 교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두 가지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우선은 모이는 교회(gathering church)입니다. 그러나 모이는 것 뿐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scattering church)가 되기도 합니다. 왜 모여야 합니까? 이미 앞 부분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는 예배하기 위하여, 또 한 가족원으로 양육되고 교제하기 위하여, 그리고 성도로서 훈련받기 위하여 모여야 합니다. 이런 모이는 교회로서 이해를 돕는 모델은 어떤 것일까요? 예배하는 교회는 마치 한 국가의 국민들이 함께 모여 질서있게 국가 예식을 거행하는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양육의 차원에서 교회는 가족과 같습니다. 마지막 훈련하는 교회로써 교회는 학교와 같습니다. 이런 모델대로 이해하자면 교인들은 소비자가 아니라 중요한 책임을 지닌 참여자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또 회원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또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한 장소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고 세상으로 파송되어야 합니다. 만일 교인들을 일꾼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이는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일하는 일꾼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말과 행실로 전하는 일(kerygma), 긍휼을 베푸는 일(diaconia), 그리고 공의를 행하는 일(dikaioma)을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교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성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데살로니가전서에 몇 군데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5장16-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또 다른 중요한 구절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는 4장3절 말씀입니다. 4장 3절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 . .”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자면 믿는 형제들은 주 안에 자매된 아내를 사랑하고 지켜 나가며 신실하고 정직한 가정 생활을 세워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형제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 형제 사랑은 바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는 근거를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모이는 교회로서 성도들 간에 나누는 형제, 자매의 사랑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째는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즉 직장, 사업처에서 자기 일에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이는 우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단정한 모습의 본을 보이게 함이며, 아울러 궁핍함을 면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보는 것과 같이 “거룩한 삶”이란 단순히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모이는 교회도 중요하지만 교회 뿐 아니라, 가정에서 또 직장에서 거룩을 연습해야 합니다. 가정의 거룩은 아내나 남편에게 신실하고 신앙의 본을 보이며 열심히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 또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의 거룩은 성실함으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눈가림으로 적당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생산성을 갖고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 관계에서 복음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댓가성 사랑이나 나의 욕망에 치우친 사랑보다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놀라운 사랑의 풍성함을 이해하고 누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교우들끼리 배려하고 사랑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서로 생각하는 방법과 행동의 속도가 달라 힘들게 여겨지는 부분도 함께 보조를 맞춰가는 아량과 여유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밖에 나가서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도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화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가르치고, 점검해 주는 것이 훈련입니다.
기쁨의 교회는 삶의 전 영역(가정, 지역교회, 직장)에서 정상적인 신앙인으로 세움 받기 위해 훈련하는 교회입니다. 모이는 교회는 훈련된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기 위하여 열심히 훈련해야 하고, 또 훈련 받아야 합니다. 성화의 다른 말은 변화와 성장입니다. 누구든지 성장이 멈추면 위험합니다. 자전거가 계속 가지 않으면 넘어지는 원리와 같습니다. 가만히 서 있으면 도태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밭이라도 가만히 두면 잡초가 납니다. 계속해서 갈고 뒤엎는 개경을 반복해야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훈련은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입니다. 성경 말씀은 모든 성도의 삶의 기초입니다. 스스로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어떤 상황에서든지 영적 자생력을 가지고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말씀의 훈련은 큰 투자가 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하고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3:16.,17). 여기 “하나님의 감동”이란 말은 “하나님의 숨”이란 뜻입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우리는 그 책에서 나오는 파워를 경험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숨이 그 안에서 생동력 있게 역사하여 우리 얼굴에다 “후~”하고 불어 내는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에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한 바른 사고의 틀을 소유하게 되고, 바른 판단력을 갖게 되고, 아울러 삶에 확신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배우고 안다는 것은 “지식”을 가졌다고 교만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 배우면 교만해집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아카데미아의 방법입니다. 세상에서 소위 “학자(scholar)”란 사람들은 서로의 지식을 드러내고 자신의 지적 가치를 선전하고 팔아야 하는 직업을 가진 자들입니다. 어떤 전문적 지식이 요구되는 부분에 있어서 이런 사람들은 사회에 많은 것을 기여하면서 아울러 자신들의 입지와 영향력을 넓혀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지혜, 신앙의 지혜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아카데미아로서 “신학”을 연구하고, 그것을 가르치며, 자기의 지식의 유용성을 마케팅한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전인적으로 온전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즉 성품이 형성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로 배워 자랑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품어, 인격과 삶에 배어 나오는 신앙적 성품을 형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에는 아픔이 있고, 심지어는 고독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성과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내 주위에서 사람들이 나의 성질을 돋구고, 나의 감정을 휘저어 놓을 때가 많습니다. “다들 가만두지 않을 거야!”라고 수없이 속으로 외치는 순간들이 우리 삶의 과정에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 안에서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소망, 믿음, 그리고 지혜에 이끌리어 우리는 스스로를 다스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바꿔 먹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려고 애를 씁니다. 말씀 공부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진리되는 원리들이 나의 삶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2:12). 여기 구원을 이룬다는 말은 구원에 다다른다(to work up to salvation)가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이 말은 구원의 현실을 내 주변으로 확산시킨다(to work out salvation)는 의미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 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증인이 되었다면,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복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훈련과 꼭 같이 가야 하는 훈련은 성령과 동행하는 의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건생활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디모데전서4:7). 경건에 이르는 연단은 계속하여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 몸을 성령의 전으로 주께 헌신하는 삶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6:19, 20). 말씀과 성령은 항상 같이 갑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항상 말씀을 동반합니다. 즉 해석이 없는 능력의 행사는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과 동행하는 삶은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적용하는 삶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인격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그분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과 대화 나누는 기도의 삶을 연습하고 더 좋은 기도자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6:33)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현실성을 강하게 인정하면서, 내 안에 이루어지는 내적 변화를 기쁨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를 사모하고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 23). 나의 삶의 전 영역에서 성령과 동행하며 말씀의 지혜를 발휘하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그 기쁨, 그 평강, 그 안식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맛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 것을 빼앗기고, 내가 무시당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 곁에서 내 욕망과 자존심을 못 박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 섬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성도의 저력인 것입니다.
또 하나의 훈련의 내용은 은사 계발입니다. 내게 주신 자연적인 은사, 그리고 내가 성령의 은혜로 강권적으로 받은 은사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은사라도 열심히 계발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고, 효력이 없어집니다. 성령께서 주신 은사도 섬김을 통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수그러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사를 계발해 나가는 것이 큰 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직접 사역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내 자신을 잘 알아가는 것입니다. 과연 나의 강점이 무엇인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에게 관심을 쏟고 양육하는 것인가? 나는 현미경에 가까운가 아니면 망원경같은 사람인가? 나는 행동파인가 아니면 사상가인가? 이런 질문들이 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 스타일은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죄성이 나의 스타일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을 잘 하는 것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아픔을 준다던지, 내가 망원경같은 큰 그림을 멀리서 보는 사람이라서 눈 앞에 있는 사람의 현실적인 문제를 무시한다던지, 또는 내가 행동파이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없이 무질서한 행동을 한다면, 이것은 나의 스타일이 잘못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용(use)이 아니고 오용(abuse)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역보다는 사람을, 지위보다는 섬김을 선택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원리는 사람을 보고 사람을 아끼고 사람을 섬기는 훈련일 것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지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사람을 좌절토록 한다면 이는 자신의 신앙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살펴 봐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훈련이 반드시 은사 계발과 병행되어야 합니다.
훈련은 반드시 파송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쁨의 교회는 성도를 세상으로 파송하여 지역 사회와 세계를 변화시키려 하는 선교적 교회입니다. 선교적 교회는 선포적 교회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그의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건져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2:9). 선포되는 내용은 “성도의 변화”입니다. 어두움의 사람이 빛의 사람이 되었다는 변화, 이 격차로 인하여 새 생명이 세상으로 쏟아지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을 향하여 쏟아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선포적 교회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는 교회가 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존재 양식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정체성을 항상 기억하고 자각하고 생각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교회도 필요한 곳으로 흘러 내려야 그 생명력이 유지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자신을 나누는 존재들입니다. 물은 흘러야 맑아지듯이 내 안에 큰 웅덩이를 만들어 계속 물이 고이게 하는 노력보다는 적절하게 고이고,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주위로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아주 건강한 모습니다. 헌금의 개념도 흘러 내려 보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주들이 추수할 때 밭의 네 모퉁이까지 다 추수하지 말고 그대로 남겨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들 중에 거하는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의 몫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소유한 토지에 있는 것이니 내 것임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남겨 두는 것입니다. 이런 유통이 있어야 온 땅이 건강하게 되고, 온 땅이 건강해야 그 혜택이 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선교는 나의 시간, 물질, 은사, 노력을 나눔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충족이 최고의 목적이 되어 있는 타락한 세상의 원리로 봤을 때 이와 같은 것은 허비일 뿐입니다. 마치 마리아가 그의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부어 드렸을 때 가롯 유다가 이것을 단호하게 “허비”라고 정의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는 돈이 무척 아깝게 느껴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돈은 물론이고 남의 돈이 쓰여지는 것이 자기 뜻과 맞지 않을 때 그것을 허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적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위해 부어지는 것은 최고의 특권이며 인간의 존엄성이 인정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하는 것은 무엇도 아깝지 않아야 하고, 또 물질보다 생명 또는 인간이 더 중요하다는 선포는 다 위대한 것입니다.
선교는 멀리가서 해야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소명이 있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으면 멀리라도 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글로벌 시대입니다. 특히 미국에는 세계가 내 문 앞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느냐보다는 누구를 보느냐 그리고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선교 대상 지역은 어디든지 있습니다. 이제는 땅끝이 눈 앞에 와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매일의 생활 터전 역시 나의 정당한 선교지이기 때문입니다.
한 자매가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자매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메일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켰던 기쁨의 교회의 메세지가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 고백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매의 심령에, 그의 가정에, 그리고 그의 직장에 매일 자신의 적은 헌신과 섬김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행복하게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자매는 분명히 세상으로 파송된 훈련된 주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