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곱 번씩

작성자:     작성일시: 작성일2012-02-16 07:57:41    조회: 2,293회    댓글: 0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을 찬양하나이다" (시119:164)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원리적으로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분의 은총을 마음에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그의 권위(authority)로 통치(control)하시며 그의 백성들과 동행(presence)하시는 모습입니다.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왕되신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 그리고 함께 하심을 기대하고 경험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느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중세기의 영성은 그러므로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서 하루에 일곱 번씩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방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적 신앙은 수도원의 영성 보다는 시장 한 복판의 영성을 더 강조 했습니다. 가시적인 세상에서 속(secular)과 성(sacred)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그어 놓는 것을 거부하고 좀 더 영적인 눈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어느 곳에 있던지, 무엇을 하던지, 오직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영화롭게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는 것이 바로 참된 영성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수도원에 머물기 보다 시장으로 나가는 것이 더 쉽게 신앙생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도리어 그 반대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오직 그 규율에 따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일 수 있고, 도리어 세상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분께 예배적 삶을 산다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싫어서 수도원을 마다하는, 즉 헌신을 두려워 함으로 세상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이런 논리를 excuse 삼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디에서든지 헌신된 삶을 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더 어려운 현장은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 아니라 도리어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장소일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시장 바닥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 수 있을까요? 시인들의 고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아침기도, 정오기도, 저녁기도, 밤기도의 구절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무조건 기도는 새벽에 해야 한다던지, 아니다 꼭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도리어 언제든지 때에따라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그의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영적 교제의 순간들을 갖는다는 고백일 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님을 찾고, 일터로 나가서 첫 순간에 주님을 인정하고, 점심을 먹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퇴근하기 전에 하나님께 부탁하고, 집에 들어가서 주님을 찬양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가족을 축복하고 마음과 몸을 주님께 의탁하는 삶 . . . . 생각의 줄을 놓고 그냥 되는대로 사는 것과 하나님 나라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왕되신 주님을 인정하며 반복해서 주를 바라는 삶이 어떻게 동일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 . .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시55: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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